안짱다리 암탉 / 구 활

 

 



유년의 기억 중에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것이 더러 있다. 그것은 나이가 들고 해가 갈수록 더욱 선하게 피어나 바로 어제 있었던 일처럼 느껴진다. 기억을 찍을 수 있는 사진기가 있다면 노출과 거리, 그리고 구도까지 딱 맞아떨어지는 정말 근사한 흑백 사진을 뽑아낼 수 있을 것 같다. 
내 기억의 언저리에는 닭 한 마리가 늘 서성이고 있다. 가슴팍에 상처가 나 있는 암탉. 그러면서 새끼 병아리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의 암탉 한 마리가 지울 수 없는 상(像)으로 망막 속에서 어른거리고 있다. 
그 암탉은 초등학교 삼사학년 때쯤 우리 집에서 기르던 여러 마리의 닭 중의 한 마리다. 꽃샘추위까지 다 물러간 어느 봄날, 암탉은 짚동 사이에 놓여 있던 봉태기 속에 알 몇 개를 낳아 품고 있었다. 
닭 한 마리도 재산이었던 시절이니 만큼 어머니는 “또 닭이 알을 품는구나. 이번 여름에는 식구가 많이 늘어나겠네”하시는 음성 속에는 기쁨과 희망이 묻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알을 품고 있던 암탉이 하늘이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러 댔다. 어머니는 “구렁이가 알을 집어먹나, 한번 나가봐라“고 말씀하셨다. 
잠이 엉겨 붙어 있는 눈을 비비며 부엌 앞 바람막이 짚동이 놓여 있는 곳으로 가니 인기척에 놀란 쥐 한 마리가 봉태기 속을 빠져 나와 쏜살같이 달아나 버렸다. 암탉은 쥐에게 가슴팍 살점을 뜯어 먹히고 있다가 도저히 못 참을 지경에 이르러 "죽겠다"는 비명을 질러댄 것 같았다. 
한밤중에 응급환자가 생긴 우리 집은 지쳐 널부러져 있는 암탉의 가슴에 머큐롬액을 바르고 다아아진 가루를 뿌리는 등 부산을 떨었다. 다행히 암탉은 죽지 않았다. 봉태기는 그날 밤부터 방으로 옮겨졌다. 암탉은 상처의 아픔을 생성중인 생명의 신비로 인내하며 결국 다섯 마리의 병아리를 알에서 깨워 내는 데 성공했다. 
아마 암탉은 가슴팍을 파고드는 쥐새끼가 알에서 갓 깨어난 병아리인 줄 착각하고 새 생명을 얻었다는 환희 속에 그걸 보듬고 있다가 변을 당했나 보다. 사고를 당한 후 암탉은 걸음걸이가 부자유스러웠다. 병아리들에게 모이를 찾아주는 일이 힘에 겨운 듯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싸래기가 섞인 등겨를 뿌려 주시면서 “우째 니 신세나 내 신세나 똑 같노” 혼잣말로 중얼거리시곤 했다. 
그것은 위로 딸 셋과 아들 둘 중 내 동생인 막내가 태어난 지 오십 팔일 만에 훌쩍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간접으로 원망하는 그런 말투였다. 삶 자체가 힘겹고 세파를 헤쳐 나가는 어려움은 어머니나 암탉이나 마찬가진 듯했다. 어머니의 아이들 학비 걱정이나 상처 입은 암탉의 모이 걱정은 그게 그거였다. 
어머니는 그 암탉을 같은 처지에 있는 측은한 아랫동서쯤으로 여기시는 것 같았다. 주일 낮 어머니가 교회에서 늦게 돌아오면 암탉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무어라 소리를 지르면 “그래 알았다. 새끼들이 굶었다는 말이구나”하시며 싸래기를 듬뿍 흩쳐 주셨다. 
그때 어머니의 눈에는 암탉 주위에서 “삐약 삐약”하고 돌아다니는 병아리가 단순한 병아리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청상으로서 부양책임을 지고 있는 다섯 남매의 모습을 아장걸음 병아리들과 동질의 것으로 인식하는 의식 속의 찰라적 착시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의 냄새에 이끌려 어린 시절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란 작품에서 보여주는 ‘기억의 연결 작용’이 어머니를 순간적으로 사로잡은 것이다. 그러니까 암탉 일가의 모습은 바로 가난과 외로움에 떨어야 하는 어머니가 이끄는 우리 가족들의 투영도였다. 그리고 어머니가 암탉 가족에게 바치는 정성과 위로는 자신을 위한 위무이거나 기도가 아니었을까. 
암탉의 상처는 죄다 아물었지만 안짱다리 걸음은 고쳐지지 않았다. 그러나 병아리들은 건강했다. 어머니는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약 병아리로 자라난 새끼들이 대견스러운 듯 “옳지 그래 장하다”며 연신 입 부조를 했으며 그 곁을 서성이는 암탉에겐 “그래, 너는 성공했구나, 성치 못한 몸으로. 너는 일어섰구나”하시며 부러워하셨다. 
긴 장마가 끝나고 불볕더위가 계속되는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는 “더위 먹을라, 조심해래이“란 당부를 나의 등교 길 어깨 위에 가볍게 얹어 주셨다. 수업을 마치고 동무들과 강에 나가 멱을 감고 지친 오후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자 어머니는 여느 날과는 달리 반갑게 맞아 주셨다. 그날 어머니의 닭 잡을 계획은 아침부터 준비되어 있었다. 아들의 ‘더위 먹음’을 미리 막아내기 위해선 안짱다리 암탉의 희생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콧잔등에 땀 봐라“하시면서 보릿짚이 순한 연기를 내며 타고 있는 양은솥을 열고 닭 곰국 한 그릇을 퍼다 주셨다. 깐 마늘을 듬뿍 넣고 고은 곰국은 시장이 반찬이 아니라 정말 맛있었다. 똥집과 날개 그리고 닭다리 한 개를 마파람에 개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감나무 밑 살평상에 누워 하늘에 구름이 떠가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였다. 
“야야, 그 닭 있제, 그 암탉을 안 잡았나.” 
그 때 말씀 속의 ‘그 닭’은 어머니에게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겠지만 나는 듣는 순간 다섯 마리의 새끼 병아리들이 어미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 슬픈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신 후의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었다. 어머니가 다섯 마리의 병아리를 보고 느낀 ‘기억의 연결 작용’이 바로 나에게로 전이된 것이다. 어머니는 “한 그릇 더 묵을래”라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세월이 흘러 내가 어머니의 그 때 그 나이쯤 되고 보니 "야야, 그 닭 있제, 그 안짱다리 암탉을 안 잡았나"의 의미를 우리 집 아이들이 알아차릴 것 같아 괜히 쑥스러운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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