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여자 / 정재순

 


 

고갯마루가 간들거렸다. 연보라 꽃이 나풀대는 양산을 쓴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나른한 여름날 오후, 한복 차림의 여자는 측백나무가 둘러진 기와집 마당으로 거침없이 들어왔다. 고요한 시골 마을에 알 수 없는 기운이 술렁였다. 일곱 살 소녀가 난생처음 양산을 만난 날이었다.

아버지의 아내는 몸매가 늘씬하고 이웃마을까지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미인이었다. 그에 반해 서울여자는 작고 오동통한 체구에 착착 감겨드는 말투를 지녔다. 겉모습처럼 엄마는 청한 목소리였고 그녀는 젖은 듯 비음이 몸에서 묻어나왔다. 경상도 토박이 남자의 가슴에 그 맛이 오죽 달짝지근하였겠는가. 당시 말씨가 그러해 서울여자로 불렀으니 아버지를 염두에 둔 예우였을 것이다.

서울여자는 오붓하던 집안에 찬바람을 몰고 왔다. 대뜸 오빠를 데리러 왔다는 가당찮은 말을 쏟아냈다. 너른 도회지에서 공부를 시켜 훌륭한 인재로 키우겠다는 것이다. 엄마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게 서 있었다. 부모가 무엇인지 형제가 어떤 건지 모르던 철부지는, 시시로 괴롭히려 드는 작은오빠가 없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슬픔이 밀려왔다. 어린 가슴에도 이러다 정말 오빠를 뺏기는 것이 아닌가, 하고 불안감이 엄습했다.

도대체 그녀는 뭘 믿고 그럴 수 있었을까. 아버지가 어떤 말을 했기에 서슴없이 오빠를 달라고 하는가. 가만있어도 구슬땀이 뚝뚝 흐르는 땡 여름날에 말이다. 암만 생각해봐도 서울여자는 지나치게 기세등등했었다. 그렇기까지 아버지의 입김이 컷을 것이다.

통이 크고 여장부 같은 엄마는 곱살스러움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여인의 향기보다는 억척스러웠다. 일곱 식솔들이 일 년 내내 먹을 밭농사를 지으며 자식들을 먹이고 거두는 데 여념이 없었다. 아버지에게 끈적한 추파를 보낼 엄두도 못 내었을 뿐더러, 굳이 아내가 지아비에게 그래야 하는지 몰랐으리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람은 오고가는 손길 속에 정이 깊어지는 법이다. 서울여자는 작고 보드라운 손으로 아버지의 외로움을 어루만지며 애정표현을 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매끈한 무릎에 뉘여 머리칼을 쓸어주면서 무뚝뚝한 아버지 얼굴에 미소를 피웠을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아양과 애교를 버무려 여우짓을 하고도 남을 여자 같았다. 가족을 어깨에 짊어진 아버지는 그런 그녀에게 잠시나마 위로를 받고 싶었을 테지.

아버지는 웃는 모습이 근사한 남자였다. 싱긋 웃을 때 생기는 깊은 볼우물과 매력적인 눈웃음을 가졌다. 집에서는 근엄하였으나 세상에 존재하는 보통남자였던 아버지도 좋아하는 여자 앞에 별 수 있었으랴.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 서울여자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궁금한 것은 엄마의 태도였다. 그런 일을 겪고 어떻게 아버지와 계속 살아갈 수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마른하늘의 날벼락도 유분수지 느닷없이 낯선 여자가 집을 찾아오지 않았는가. 하물며 맡겨놓은 자식 찾아가겠다는 듯, 배 아파 낳은 당신 아들을 내놓으라고 했겠다. 엄마는 허방을 딛는 것처럼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렸을 것이다.

오빠를 가졌을 때 유난한 입덧 때문에 할머니 담뱃대를 몰래 빨았던 기억을 떠올렸지 싶다. 분만하고 두 칠도 안 되어 날것으로 쌈 싸 먹은 탓에 이가 망가졌던 일이 생각났을 터이다. 불벼락이 내리쳐 이 또한 지나가리라……. 수없이 되뇌이며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았을까.

어릴 적부터 대통령이 되겠다고 버릇처럼 말하던 작은 오빠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자가 엄마 행세를 하며 따라가자고 했으니 얼마나 황당하였겠는가. 그날 이후 오빠는 아버지와 눈 마주치기를 꺼렸다. 서울여자가 똑 같은 요구를 하러 다시 들이닥친 날, 오빠는 또렷하고도 분명하게 말했다.

"아줌마는 엄마가 아니다. 내 엄마는 여기 계신다. 우리 집에 절대로 오지마라."

그것은 차라리 울부짖음이었다. 시골소년의 거침없는 항변은 온 동네를 흔들어 놓았다. 그날 이후, 서울여자는 우리 집 주변을 얼씬거리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서울여자도 가여운 여인이다. 한갓 바람의 입발림에 자신을 송두리째 바치려 했던 여인이다. 아이를 못 낳는다는 이유로 첫 남편에게 소박을 당하고 새로 만난 남자를 필연이라 믿었다. 어쩌다 옆을 본 아버지는 마음을 홀딱 빼앗긴 그녀한테 엉겁결에 약속하고 말았다. 자신의 아내가 낳은 자식을 맡긴다는 말에 서울여자의 당당함이 하늘을 찔렀던 게다. 이제 행복한 내일이 펼쳐질 줄 알았으나 정작 아버지는 엄마와 헤어질 마음을 추호도 먹은 적이 없었다.

봄바람이 분다. 남녀 간에 곰보 자욱이 보조개로 보이면 설렘은 시작된다. 눈 먼 그리움은 거침없고 달뜨는 날들로 이어진다. 그런 사랑도 뜻밖의 이별이 찾아오고, 뼛속까지 사무치던 아픔도 세월이 흐르면 아련한 추억으로 남는다. 아버지는 그저 지나가는 한줄기 바람이었다. 바람은 머물지 않고 스쳐지나갈 뿐이다.

어느덧 반백년이 흘렀다. 지금도 한복 차림에 양산을 든 아담한 여인을 길에서 만나면 서울여자 생각이 난다. 그녀에게 죄가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믿은 죄, 운명처럼 다가온 사랑에 솔직했던 죄가 아닐까. 사람이 사람에게 품는 정을 어찌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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