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동자와 입술 / 임헌영  

 

 

 

'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네'란 구절에 매료당하는 사람은 바람둥이거나 그럴 개연성을 가졌다면 인생이 너무 삭막하니 차라리 낭만적이라고 얼버무릴까 보다. 눈동자가 정신적인 운기를 상징한다면 입술은 자식을 비롯한 육체적인 기운을 담고 있기에 이 둘만 보면 한 인간의 전체상을 파악할 수 있대도 지나치지 않다.

사랑스런 눈이기에 우안牛眼이나 사목蛇目, 삼백안三白眼이 아님은 물론이고, 전택田宅, 처첩妻妾, 간문奸門, 남녀男女부위가 단아한데다 어미魚尾와 와잠臥蠶이 산뜻한 가운데 검은 동자가 자그마하고 샛별처럼 총명했을 터이다. 입술은 뾰족하지도 넙적하지도, 삼각입술도, 아래 위 어느 한쪽이 두껍지도 않는 알맞게 긴장된 자손의 관을 지닌 모습이었음에 틀림없으렸다.

박인환이 이런 구절을 읊조렸던 서른 살도 못되던 한창 시절(그는 서른에 죽었다)의 배도 더 살아온 나로서는 그리 뛰어난 기억력이 아닌데도 눈동자 입술은 몰라도(그럴만한 경력도 없지만)이름은 알 것 같은데 어찌 그는 20대 후반의 총총하던 시절에 이렇게 고백했을까.

혹 이름을 대면 당사자 하나 이외의 서운해질 다른 눈동자와 입술을 가진(그걸 안 가진 사람도 있나?)대상들이 떠올라 그들을 고려한 박애주의적 의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름 밝히기가 싫었거나 그래서는 안 될 상대라 입막음용 수사법의 활용일까.

이런 해석은 무의식적으로 시인이 한 여인과 육체적 접촉이 있었다는 전제에서만 가능하다. 여기에다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날의 공원'을 연상하면 하루 이틀도 아닌 두 계절에 걸쳐 모종의 사연이 축적된지라 더더욱 육감적인 상상력을 자극한다. 러브 호텔이 없었던 시절이라 가로등 그늘이나 벤치 위에서의 사랑이었겠지만, 요즘처럼 애정의 속도전에 익숙한 사람들은 쉽게 당시의 실제 상황보다 더 진한 연출 장면을 상정하여 이를 기절 사실화해 버릴 소지가 있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면 시인과 여인은 그저 바라만 보던 관계였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호숫가를 맴돌며 애틋하게 바라만 봤지 그 명경지수明鏡止水에게 한 점 부끄럼도 없었을 것이며(하기야 그 자체가 오히려 최대의 수치라고 우기면 할말이 없지만), 벤치에서도 그 원래의 기능을 이탈하여 다른 목적으로는 결단코 전용轉用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무슨 근거에서냐고 따진다면 신체의 다른 부위가 아닌 눈동자와 입술을 유독 부각시킨 점이 이들의 결백을 증명할 만하다고 변호하겠다. 이런 고운 자태를 갖춘 사람이라면 가로등 그늘이나 호숫가의 옹색한 벤치에서 입술을 도둑맞지는 않았을 터고, 이만한 아름다움을 알아 볼 만한 미학적 식견을 가진 자는 그 초라한 무대에서 구차한 욕정을 억제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들은 필시 입맞춤의 미수범일 것이다. 

사람에 따라 처음 만날 때 상대를 유심히 관찰하는 신체적 부위가 다른데, 그게 어쩌면 그 인간됨을 은연중 상징하는지도 모른다. 나도 누굴 만나면 상대의 시선이 나의 어디를 관찰하느냐를 관찰하는 버릇이 있다. 간혹 돋보이기를 좋아하는 분들은 유난히 특정 부위로 상대의 시선을 끌어들이기도 하는데, 이 역시 해당 부위가 그 위인의 운명을 상징한다고 치부해도 무방하리라. 요즘은 신체부위보다 옷이나 장신구로 상대의 시신경을 마취시키려는 위장전술도 빈번하지만, 웬만한 식견을 가진 인격체들은 이내 투시경으로 무장하여 그 허위성을 간파하고 만다.

첫 시선이 가는 부위에 대한 통계는 안 내봤지만 대개 눈동자와 입술에 가장 빈도수가 높지 않을까 싶은 건 그만큼 관상에서 이 부위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데다 관찰하기에 제일 편하기 때문이다. 눈동자와 입술을 보여주는 게 어쩌면 최상으로 진솔한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지 않을까 싶다. 

거기에다 눈동자와 입술은 얼굴에서 가장 조화와 질서를 중시한다. 눈은 아름다우나 코가 못 생기거나, 입술은 좋으나 귀가 못 생긴 예는 흔하지만 눈동자가 예쁘면서 입술이 못난 경우는 드물다. 눈과 입술은 천상 운명을 함께 하는 것 같다. 코를 뛰어넘어 눈동자에서 바로 입술로 시선을 머물게 하는 내력이 이렇다.

사진으로 본 박인환의 인상 또한 선량한 눈동자와 유혹에 잘 넘어갈 듯한 입술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의 남녀는 미처 유혹하거나 당할 여유도 없이 후닥닥 여름과 가을을 보내 버렸고, 그 아쉬움이 시인으로 하여금 눈동자와 입술을 그리워하도록 만든 것 같다. 이룩한 사랑의 추억에 못지않게 그리워만 했던 사랑의 시도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기는 마찬가지다.

인생은 이렇게 미완성 행위의 축적 위에서 예술을 잉태시킨다. 그 눈동자 입술은 정복되()지 않았기에 영원히 남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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