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마차를 타다 

심 선 경

 


분명 이름은 마차인데 포장마차엔 말馬이 없다. 그래서 이 마차는 당신이 원하는 곳까지 달려가지 못한다. 다리가 잘려버린 말 대신, 의족처럼 둥그런 바퀴를 끼워 놓았지만, 그마저도 수술이 잘못되었는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지붕을 덮은 방수 천막은 네 귀를 잡아당겨 못질을 단단히 하고, 아예 멀리 도망가지 못하게 무거운 약수통으로 눌러 꼬리를 바닥에 들러붙게 했다.

수시로 포장을 열고 닫으며, 마차에 오르거나 내리는 사람들을 마부는 친절히 맞이하고 또 배웅한다. 가끔은 “나 여소,” 하며 포장을 걷어 올려 승객의 접근성이 용이하도록 마차로 유인할 때도 있다.

강철같이 두텁고 육중한 세상의 벽에 여러 번 부딪쳐 본 이들은 안다. 세상은 그 어느 것 하나 호락호락한 것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벽이 가르는 세상의 이쪽과 저쪽은 극명하게 구분되어 있다는 것을. 마차에 오르는 사람들은 자신이 마주한 벽의 바깥과 안쪽의 삶이 항상 치열한 전쟁터처럼 살벌하다고 느끼는 걸까. 벽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안쪽으로 들어가려 죽을힘을 쓰고, 벽의 안쪽에 있는 사람들은 밀려나지 않으려고 바깥사람들을 의식적으로 배척한다. 처절한 생존 여건은 극도로 열악해지고 제한된 식량과 자원을 지키기 위해 벽 내부의 사람들은 대규모의 장벽을 설치해 밀려드는 상대를 막는다. 지금은 벽의 안쪽에 있지만, 항시 그 벽의 바깥으로 추방될 위험성을 안고 있는 셈이다.

어엿한 지붕이 있는 식당에 들어가면 한결 더 푸근할 텐데, 왜 사람들은 한겨울에도 바람 숭숭 들어오는 포장마차의 장막을 들추고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일까. 일부러 찾아갈 때는 잘 보이지 않는데,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다 구수한 어묵 냄새에 훅 끌려 들어가곤 하는 곳이 포장마차라서 지갑에 천 원짜리 몇 장은 넣어둬야 안심이 되지 않던가.

이미 전작이 있어 거나하게 취한 승객들이 포장마차에 오르면 마차의 속도를 까맣게 잊는다. 촉수 낮은 알전구가 방금 승차한 손님의 그림자를 길게 늘이지만, 마부는 그 손님의 목적지가 어딘지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다. 마차 안에 놓인 간이의자엔 삼삼오오 자리를 잡은 노동자들이 빈 소주병을 바퀴 대신 굴리며 시간의 레일 위를 마음껏 질주한다. 그들이 탄 마차는 물리적 거리를 이동하기는 힘들지만, 정서적 거리는 어디로든, 얼마든지 이동이 가능하다.

불이 켜진 포차 거리는 그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마치 색다른 신세계를 보는 듯하다. 지하철역 인근 포장마차 거리는 오히려 비 오는 날이 불야성을 이룬다. 하지만 그 옛날 서민이 다녔던 포장마차의 감성을 기대하지 마라. 메뉴판에 적힌 소주 한 병 가격은 6천 원이고, 동태탕이 2만 원, 돼지고기 두루치기가 2만 8천 원인걸 보니 일반 술집과 버금가는 안주 값은 얄팍한 주머니를 탈탈 털어 졸지에 우리가 거지 신세로 전락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포장마차의 어떤 힘이  나를, 그리고 너를, 우리를 그 불빛 아래로 소환하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잿빛 도시, 시멘트로 빚은 우리의 자화상은 세상의 육중한 벽 앞에 거칠고 앙상한 육신으로 그려지지만, 제각각 눈높이가 다르듯 저마다 짊어진 삶의 무게가 달라, 그런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인간다움의 길이라면 기꺼이 수용할 마음가짐이 되어 있다. 지금은 다들 고개를 떨구고 잔뜩 웅크려있지만, 조금은 더 나은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가야 하는 삶이기에 실낱같은 희망일지라도 쉽게 포기할 수는 없지 않는가.

퇴근길엔 만차가 되어 미처 올라타지 못한 승객들은 마차 앞 등받이 없는 플라스틱 의자에 죽치고 앉아, 먼 저 탄 누군가가 빨리 하차하기만을 기다린다. 신기하게도 이 격식 없는 둥근 플라스틱 의자에 앉으면 누구랄 것도 없이 평등해진다. 그래서 포장마차에 올라타면 다른 곳에서보다 이야기가 술술 잘 풀리는 건가.

언제부턴가 나도 이 마차에 올라타고부터는 그 잘나가던 속도감을 잃고 말았다. 맑은 소주잔을 앞에 놓고, 늙은 도마 위에서 난도질당하는 낙지 한 마리의 맹렬한 꿈틀거림을 하릴없이 지켜보고 있다. 서울 출신 친구는 처음에 ‘낙지탕탕이’만은 죽어도 못 먹겠다더니 어쩌다가 그 맛을 한번 본 뒤로는 마차를 타자마자 그것부터 주문하는 대담성을 보였다. 우리는 채찍 대신 칼을 든 마부에게, 큼직하게 썬 야채 몇 조각과 막장을 조금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습관처럼 뼈 없는 닭발을 한 접시 더 주문한다. 오지랖 넓은 이 친구는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이 말이 아니라며 가슴 아파한다. 그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 눈물 콧물 다 짜내고도 모자라 어떤 때는 잃어버린 내 배꼽을 찾느라 마차 바닥을 샅샅이 수색해야만 했다.

일면식조차 없는 사람들인데 이 포장마차에 승차한 사람들은 낯설지 않다. 그냥 아무 말이라도 이쪽에서 던지면 저쪽에서는 익숙하게 농으로 되받아친다.

전쟁 같았던 하루 일과를 보내고, 쓰린 속에 소주나 막걸리를 냅다 들이부으며 또다시 살아내야 할 내일을 위해 모인 서민들에게 이곳은 희로애락의 공간이 된다. 하지만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평생 낙원에 도착할 가망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미리 알아챈 취객들은 아무리 마차를 타고 달려봐야 자신이 개척할 땅이 없음을 알고 밤새 제 몸뚱아리에 가혹한 채찍질을 해댄다.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어느 날 회사 측으로부터 휴대폰 문자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는 어느 가장이 옆자리에 앉았다. 쓰디쓴 그의 인생을 맛보는 듯 소주잔에 술을 가득 따라 마신다. 그가 노가리를 질겅질겅 씹을 때, 아담이 선악과를 먹다가 목에 걸려서 튀어나왔다는 목젖이 심하게 꿀렁거림을 보았다. 마음을 비우는 것보다 소주잔을 비우는 것이 훨씬 더 빠르고 쉽다는 것을 깨달을 즈음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여기 소주 한 병이랑 오징어무침 추가요.”

발밑에 패잔병처럼 짓이겨지는 담배꽁초들이 단칸방에 한데 모여 사는 가족들처럼 서로 얽히고설킨다. 이윽고 마차가 새벽이라는 종착역에 닿으면, 모여들었던 일개미와 일벌들이 이슬에 젖은 몸을 털고 일어나 다시 지하의 세계로 끌려 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