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간격 / 이현숙
사람과 사람 사이가 막혔다. 상점에서 물건을 살 때도, 약국에서 처방 약을 받을 때도 전에는 없던 유리가 방어벽을 치고, 얼굴은 마스크로 반쯤 가려야 한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사회적 거리 두기(Social Distancing)’는 자신과 가족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6 Feet 떨어져야 안전하다니 별수 없다. 어제는 큰아들과 그의 여자 친구가 집에 왔다. 한 달에 한 번은 함께 식사를 했는데, 두 사람은 차 안에, 우리는 집 울타리 안에서 인사를 주고받았다. 집에 들어오라고 해도 자신들은 병원에서 일하기 때문에 혹시 병균을 옮길까 봐 안 된다고 했다. 마스크를 하지 않은 나에게 남편이 얼른 씌워준다. 아들이 말끝에 치약이라고 하니 남편이 집으로 뛰어 들어가 예비로 준비해둔 치약을 가져왔다.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는 아들의 빼꼼히 열린 자동차 유리창으로 밀어 넣었다. 나도 밑반찬 넣은 가방에 쌈장을 잊었기에 “잠깐”을 외치며 냉장고로 향했다.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 서너 번 교대로 왔다 갔다, 뛰어다녔다.
얼굴을 가린 채 눈만 보고 나누는 대화는 아쉬움을 가득 남겼다. 유리창과 마스크가 우리의 대화를 절반 뚝 잘라먹었다. 아들의 차가 떠난 후에도 안 보일 때까지 바라봤다. 눈앞에 두고 그저 유리창 너머로 안부를 묻고 걱정하다 헤어지다니. 우리가 지금 뭐 하고 있는지. 밥 한 끼 따끈하게 먹이지 못했다고 아쉬워하자 남편은 드라이브 스루(Drive-Through)라도 만나서 서로의 건강을 확인하면 된다며 위로했다.
드라이브 스루는 운전석까지 서비스해 주는 비즈니스다. 최초로 도입했던 곳은 1930년대 미국 세인트루이스의 그랜드 내셔널은행인데 이미 우리 생활 깊숙이 자리 잡았다. 패스트푸드나 커피 전문점은 기본이며 은행과 약국 그리고 예방주사도 차에 앉아서 해결한다. 라스베가스에서는 결혼식도 속전속결 드라이브 스루로 한다. 일본에서는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방명록에 이름을 적는 장례식을 한다는 기사에 시간이 돈인 세상에 산다는 걸 새삼 느꼈다. 주차하고 매장에 들어가지 않아도 주문과 수령이 차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신속하다. 주차할 공간을 찾느라 소비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고 실내장식과 인건비 등을 절감할 수 있어 경제적이다. 장애인이나 오랜 시간 서 있거나 걸을 수 없는 노인, 임산부에게 편리한 것도 장점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퍼지자 한국은 승차진료소를 신속하게 설치했다. 진료소에 온 사람이 차 안에서 의료진과의 면담부터 체온 측정, 채취까지 10분 안에 하게 되니 시간을 줄이고 감염 걱정까지 덜 수 있었다. 세계 각국은 그 우수성을 감탄하며 따라 했다. 미국도 지역마다 설치했다. 그 장점을 이곳저곳에서 활용해 도서관에서는 드라이브 스루로 책을 대출해 준다. 예배도 주차장에서 각자의 차 안에 앉아서 드린다. 학교에서는 아침나절에 무료로 급식을 나눠주는데 차들이 길게 줄을 서고 봉사자들이 차로 가져다주기에 거리두기 정책에 딱 맞는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유리와 마스크로 막은 거리만큼 관계가 단절된다. 얼굴을 마주 보고 눈 맞춤하며 이야기를 나누어도 때론 상대의 감정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런데 플라스틱이 둘 사이를 갈라놓으면 자잘한 느낌이 이리저리 굴절되며 튕겨 나가기에 통할 수가 없다. 막힌다. 마스크로 반을 가린 얼굴은 상대의 표정을 알 수 없어 말만으로는 다 전달되지 않아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신체 접촉은 금기다. 악수도 손을 잡은 강약이나 각도에도 감정이 전해지고 반가운 표현으로 나누는 포옹에도 깊이와 도닥이는 손길에 상대의 마음과 온기가 실리는 걸 느끼는데 이도 저도 못하는 불통의 시대다.
당분간 가족과 친지, 지인과 만나지 못하니 마음이 불편하다. 친교 모임도 취소되어 답답하다. 남편의 전 직장동료의 장례식도 가족만이 간단히 치를 수밖에 없어 안타까웠다. 옆집 친구 집에서 매주 금요일 밤에 영화를 보며 테킬라 한 잔씩 마시던 일도, 그들의 손녀딸인 에마와 소꿉놀이도 멈추었다. 차선책으로 스파이 접선처럼 전화로 약속을 한 후 서로의 앞마당에서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 에마가 숨바꼭질하자고 조르면 나는 한쪽 그늘로 숨고 그 아이는 집 기둥에 기대어 숫자를 세었다. 우리에게 건너오려는 작은 아이를 막는 서로의 마음이 불편하다.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서 거리를 둬야 하지만, 서로에 대한 친밀감을 표현할 수 없어 갑갑하고, ‘혹시’나 ‘설마’ 하면서 서로를 밀어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지나치게 가깝거나 먼 것을 경계하고 알맞은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옛말이 있다. 알면서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좋으면 자꾸 만나고 싶어 마음이 먼저 앞선다. 때론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그보다 주고받는 정이 삶의 윤활유가 되기에 곧 잊는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서로 부대끼며 지지고 볶다 보면 그 안에서 미운 정 고운 정 나누며 살아야 제 맛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유리벽과 마스크가 갈라놓은 후 그동안 맺은 인연을 돌아보게 되는 기회가 됐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몸은 멀어도 마음은 가까이’하라는 말처럼 그동안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었던 안부를 물으며 거리가 멀어지지 않게 해야겠다. 거리 두기가 아니라 그리운 간격이라 생각하자. 나에게 소중한 분들이기에.
그리운 간격, 절실한 표현이네요.
모든 것 지나고 소중한 분들과 마주 할 날이 오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