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으로의 여행은 행복하다. 40년이라는 세월을 훌쩍 넘었는데도 어지럼증이 일지 않았다. '귀밑 1cm' 단발머리 여고생 여덟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한 동기가 멋쩍은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했다가 "뭐야. 친구끼리"하는 반가움의 질타를 듣고 머리를 긁적였다.
친구라는 단어는 참 좋다.
우리는 목멱산(남산)을 3년 동안 오르내리며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낸 사이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버스 정류장에서 언덕을 한참 오르고 정문에서 또다시 운동장, 그리고 교실까지 언덕과 계단으로 이어지기에 등교가 아니라 등산이었다. 점점 굵어지는 종아리로 시집이나 갈 수 있을까 농담을 하기도 했다.
너 이름이 뭐지. 몇 반이었니. 담임선생님이 누구셨더라. 내 짝이었는데. 담임선생님이 십몇 년 교사 생활에 고구마 구워 먹지 말라고 조회 시간에 말하기는 처음이라며 우리들의 극성을 나무랐던 에피소드로 모두 배를 잡고 웃었다. 국군의 날 여의도 광장에 가서 카드섹션을 한 후 배급받았던 빵 맛을 기억했고, 장충동 체육관에서 숭의 농구부를 응원하며 '박찬숙'을 목 터지게 외치던 순간의 환희도 나누었다. 성적 고민과 우정 그리고 미래를 향한 도전과 환상으로 물들었던 소중한 시간, 돌아갈 수 없기에 더욱더 안타깝지만 그때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
추억의 보물 상자에서 기억을 하나하나 꺼낼 때마다 그 시절로 돌아가 맞장구쳤다. 맞아, 맞아. 그때 그랬지. 정말? 난 왜 기억이 안 나지. 시간의 공백이 무색할 정도다. 어제 점심을 함께하고 헤어졌다가 오늘 저녁을 먹는 것처럼 흉허물 없이 이야기 봇물 속에 풍덩 빠졌다.
그 시절 우리는 순수했고 열정이 있었다. 청소년기와 성인의 중간에서 세상의 치열함을 깨닫지 못한 채 꿈을 키우던 시기다. 성장통을 함께 겪으며 그 안에서는 가식도 허세도 필요치 않았다.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받아들였던 때이기에 어색하지 않게 돌아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얻게 된 모든 의무를 잠시 내려놓고 온전히 '나와 우리'만을 생각한 시간이다.
살면서 가끔은 나 스스로에 선물을 주고 싶을 때가 있다. 자식들 결혼 문제로 또 부모님 건강 걱정을 하는 '낀세대'라 할 일이 많지만 순수했던 내 모습을 만나고 싶다. 두 달마다 만나기로 했다. 그 안에서는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내 편이 되어 위로와 위안을 줄 것이다. 당을 충전하듯 여고 동창은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활력소다. 추억은 그 순간을 떠올리며 살아가는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 준다. '귀 옆 흰 머리카락' 친구야! 우리 건강하게 자주, 오래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