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모금 입안에 머금는 것으로 사람을 강하게 끄는 술이 있다. 데킬라다. 1990년대에 서울의 친지들이 LA를 방문하면 벌레가 들어간 술을 찾기도 했다. 아가베 웜(Agave worm)이라고도 불리는 이 벌레는 용설란 표면에 붙어사는 나방의 유충이다. 술의 농도를 정확하게 측정하지 못했던 시절에 벌레를 넣어 썩지 않고 잘 보관되면 충분한 농도로 술이 만들어졌다는 걸 판단했단다. 또 실수로 들어간 벌레가 결과적으로 맛을 향상하게 시켰고 정력 강장제라는 소문이 나면서 계속 넣었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데킬라는 격찬 또는 감탄이라는 뜻으로 멕시코 지역의 이름이다. 멕시코 특산의 다육식물인 용설란(龍舌蘭)의 수액을 증류해서 만들었다. 마시는 방법이 재미있다. 스트레이트 잔에 술을 따르고 레몬이나 라임을 손 등에 바른 후 소금을 뿌린다. 잔을 비운다. 알코올 향이 식도를 타고 올라오기 전에 레몬즙과 소금을 바른 손등을 재빨리 핥는다. 짠맛과 신맛이 입안에 퍼지며 속에서 불이 확 올라온다. 멕시코인의 열정적인 민족성을 닮아서 강하면서도 깔끔하다. 딸기 주스를 섞어 만든 칵테일, 마가리타는 달달해서 알코올 알레지가 있는 나도 한잔 정도는 즐긴다.
얼마 전에 멕시코의 산펠리페에 다녀왔다. 작은 어촌마을이다. 때마침 방파제에서 새우 축제가 열렸다. 천막이 줄지어 서고 각종 새우요리와 토산품을 팔았다. 보난자라는 상호가 적힌 깃발이 펄럭였다. 그 앞에는 황톳빛 흙을 구워 만든 투박한 잔의 테두리에 고춧가루를 묻히고 오렌지 주스와 데킬라로 만든 칵테일을 10불에 팔았다. 나는 술잔에 끌렸고, 남편은 부드럽게 넘어가고 향도 좋다며 두 잔을 마셨다. 카우보이의 대명사 보난자와 데킬라의 만남이다. 그 자리에서 2병을 75불에 샀다.
옆집의 헤수스는 데킬라의 고향인 멕시코 과달라하라 출신이다. 우리는 금요일이면 그의 집에서 데킬라를 마신다. 약간의 알코올이 긴장을 풀게하고 영어와 스페인어가 서로 섞인 보디랭귀지로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며 가까워졌다. LA로 돌아와 헤수스에게 미국에서는 이 상표를 구할 수 없다며 의기양양하게 내밀었다. 호기심 가득 담긴 눈으로 병뚜껑을 연 헤수스는 순간 고개를 휙 돌렸다. 거실에 알코올 냄새가 스멀스멀 자리를 잡았다. 병에는 정체불명인 싸구려 술이 들어 있었다. 이럴 수가. 사기다. 마주 앉은 네 명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결국 그날은 소주 한잔씩을 마셨다. 허탈했다. 돈도 아까웠지만 속았다는 것에 더 화가 났다.
그 후 두 남자는 가끔 '하이, 보난자' '하이, 데킬라'라며 서로 장난을 친다. 새로운 별명이다. 한 잔 술에 얽힌 이야기로 자라온 환경이나 문화가 다른 사람이 함께 공감하며 정을 쌓는다. 오늘 아침에는 목감기에 걸려 고생하는 남편에게 헤수스는 감기가 뚝 떨어진다며 레몬주스를 넣은 데킬라를 건넸다. 이런 게 살아가는 맛이 아닐까.
참, 재미있게 사시는 것 같아 부럽습니다.
어디서나 주위에 밝은 에너지를 느끼게 하는 사람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