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는 즐겁다

 

내가 사는 밸리 지역 신문에 자주 올라오는 기사가 있다. 창단된 지 6년이 지난  '밸리여성 매스터코랄'이다. 기실 밸리를 대표하는 여성파워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오래 전부터 관심이 있었지만 직장에 매어있는 나로써는 감히 입단할 꿈도 꿀 수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과 인연이 깊었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나라 생활 수준은 몹시도 낮았을 뿐 아니라 예능교육의 기회가 거의 없었다. 이북 피난민인 우리 가족도 예외가 아니어서 생계유지와 네 자녀 교육을 위한 부모님의 피나는 노력과 희생이 있었다. 딸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라시던 엄마는 자녀 양육 철학인 '도둑질 빼고는 다 배워라'를 내세우며 아이들의 소질과 개성을 주의깊게 파악하셨다. 실제로 이러한 엄마의 관심 덕분에 내가 살아오면서 많은 탤런트를 개발하여 이웃과 나눌 수 있는 풍요로움을 축복받았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 피아노와 성악 개인 렛슨을 받기 시작했다. 돈암동에서 정릉의 선생님 댁까지 버스를 타고 열심히 다녔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 교통이 마비되었던 어느 추운 겨울날엔 중무장을 하고 그 먼 거리를 걸어갔던 기억도 가슴 한켠에 남아있다. 그땐 집에서 연습할 피아노가 없었기에 엄마의 재봉틀 위에 아버지께서 그려주신 빳빳한 마분지 건반을 올려놓고 악보가 내 손에 외워질 만큼 반복하곤 했다. 오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 시절에 배운 기초로 피아노를 연주한다.  

나의 타고난 음악적인 소질을 계속 발휘하여 당시 라디오 방송국 어린이 프로그램에서 줄곧 노래를 발표하고 'KBS 어린이 합창단'에 입단하여  많은 공연과 방송활동으로 초등학교 시절 추억의 보물창고를 가졌다.

,고등학교에서 학업에 열중하면서도 교내 합창단 활동을 쉰 적이 없었다. 그만큼 내게 노래는 멈출 수 없는 열망이었다.

 

노래하기만큼 공부도 열심히 하였다. 항상 엄마는 목표로 삼은 그 무엇에 대해 최선을 다하지 못함을 크게 꾸짖으셨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대학교 합격 소식이 있던 날 엄마는 정말 기뻐하셨다. 수 개월 후 엄마는 나를 영원히 떠나셨다.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난 얼마 후 사랑하는 조 수녀님께서 기타를 선물로 주셨다. 당시는 대학가에 통기타 열풍이 불고있을 때라서 내겐 새로운 음악 세계를 접할  좋은 기회였다. 왼손가락 손톱 밑이 부어올라 물집이 잡히고 피가 나서 굳은 살이 박이도록 코드 연습을 했다. 대학 생활 내내 학교 행사에서 활동은 물론 학과 답사여행 때에도 기타는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었다. 성당에서는 복음성가 반주로 은혜로운 시간을 도울 수 있었고 마음이 울적할 때에 추억을 회상하며 노래 부르면 빛바랜 기억들이 되살아나 잃어버렸던 조각들이 살포시 나의 가슴을 보듬는다.

 

지금 나는 오랫동안 열망하던 여성합창단의 단원이 되었다. 대학 졸업 후 한 번도 쉬지 않고 일했다. 젊음과 야망 속에서 절제를 배웠고 나름대로 사회에 이바지하며 생존해 왔다. 이제 다시 나만의 세계로 회귀하여 흩어진 옷매무새를 바로 잡고 신발 끈을 고쳐 맨다. 중년을 훌쩍 넘은 나이에 모여 노래하는 단원들의 모습에서 무언지 모를 애절함이 느껴진다. 늙음에 대한 안타까움일지도, 아니면 인생에서 지고 있던 짐을 모두 벗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정리하고픈 차분한 열정일 수도 있다.   

이젠 세월의 흐름 만큼 내 목소리도 퇴색되어 가지만, 나는 노래를 그치지 않으리라. 살아오는 동안 내게 주어졌던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리라. 바람에 노래를 실어 대지에 흩어놓으며 누구나 한번 뿐인 삶을 기쁘고 아름답게 노래하라 외치고 싶다. 내 마음 안에 스쳐간 모든 이들의 멜로디가 각기 다른 음색으로 남아있다.

오늘도 새 아침을 열어 아름다운 이 세상을 찬미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