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암 쌍둥이                                                      

 

‘가시나무'라는 대중가요가 있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중심 잡고 살아가는 일이 잘되지 않은 뿐더러 사랑이 쉴 자리를 찾지 못한다는 가사 내용이다. 원래 곡조가 애절한 데다 아주 여린 외모를 가진 남자가수의 목소리가 듣는 이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바람이라도 불면 가시나무 줄기는 서로 부딪혀 엉기고 상처를 주지만 그래도 한 나무에 붙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노래한다.

언젠가 TV에서 두 몸이 하나로 붙어있고, 머리에서 가슴까지는 독립된 두 인간인 시암 쌍둥이를 본 적이 있다. 한 몸에 불완전한 다른 하나가 붙어있는 셈이다. ‘시암’ 은 옛 태국을 말하는데  처음 이런 모습의 인간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백인 자매는 다행히 노래 부르기를 좋아해 중부의 작은 마을에서 가수로 살아가고 있다. 주체가 되는 하나가 가슴까지 밖에 갖지 못한 다른 자매를 거의 안고 다니는 지경이다.
다른 남자 시암 형제가 비쳤다. 거의 오십 대로 보이는 그들도 긴 세월을 한 몸으로 살아왔다. 가족에 둘러싸여 생일을 축하 받는 장면이었다. 생각이 다른 두 개체가 죽는 날까지 뗄 수 없는 한 몸으로 살아간다는 모습이 처절해 보이기 마저 하였다. 

휴가를 얻어 남편 곁에서  치료를 도우며 집에 머물렀던 때가 있었다. 그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아 약 5주간의 호스피스 기간이 될 무렵 그는 떠났다. 난 바로 은퇴를 했다. 근무하던 직장에서 돌아오라는 오퍼가 있었으나 그때엔 아무런 생각도, 내 삶도 예견할 수 없어 무조건 그대로 멈추고 싶었다. 퇴직 하기에는 너무 이른55세에 직장을 떠난 것이 어쩌면 남아 있는 시간을 무책임하게  결정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62세라고 규정된 조기 은퇴 나이가 요즈음 들어 늘어나는 추세다. 건강과 능력이 갖춰진 고급 인력이 물러난다는 것은 어떤 면으로 낭비일 수 있다. 숙련된 기술과 경험은 아무리 신교육의 앞선 기술을 가졌다 해도 젊은 세대가 따를 수 없는 영역인 까닭이다.

 

2015년의 새해 첫날을 맞았다. 지금은 무언가 적극적인 삶의 환경을 만들 귀중한 선택이 필요하다는 소리가 끊임없이 내 안에서 들려온다. 다음 주에는 외손자의 열 살 생일을 축하하는 파티를 가질 것이다. 혼자가 된 후로 지금까지는 손자를 돌봐 주는 일에 거의 주도권을 빼앗긴 내 시간이었다면 이젠 부쩍 자라나 내 손이 크게 필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간섭받기는 더욱 싫어하는 아이를 그냥 곁에서 지켜봐 주는 일로 충분한 때다.
내 안에 있는 많은 내가 동시에 외친다. 노래를 좋아하니 열정적으로 불러라, 글쓰기에 더욱 노력하여 제대로 된 수필 하나라도 완성해라, 많은 사람을 찾아다니며 즐거운 모임을 꾸며주고 기뻐하게끔 도와줘라, 아니면 평생 착실히 하지 못했던 살림 정리와 두 딸을 위해 시간을 할애하며 주부의 결말을 장식하라.

나는 내면적인 시암 쌍둥이다. 두 머리를 가진 그들은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여 행동으로 옮기며 살아가는데, 내 한 머릿속에서는 수없는 생각이 각각의 다른 주장을 들고 나를 설득한다. 어떤 계획을 수렴할 것인가. 살아온 시간 속에서 내가 습득한 타성이 아닌 현재의 환경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 사회에 동떨어지지 않는 유연성을 갖고 싶다. 오늘날의 생활연령은 생체나이의 80%로 계산한다니 난 아직 활기찬 중년이다. 요즈음 제일 뜨는 노래가 '내 나이가 어때서?'란다. 손자 생일파티 준비부터 끝내고 차근차근 계획을 적어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