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신혼여행 사진을 펼쳤다. 오늘이 46주년 결혼기념일이다. 사진 속의 신부를 보니 그때의 내가 생각난다.

같은 직장에서 신랑을 만나 YMCA에서 구 목사님 주례로 결혼식을 치렀다. 신혼여행지인 제주도로 향했다. 그 당시의 제주도는 지금처럼 화려하지도 않았고 그저 소박한 농촌과 어촌이 어우러진 도시였다. 호텔 입구로 들어가기 전에 연세 많으신 할머니 파인애플과 귤을 팔아드리려고 한 보따리 사서 들고 들어갔다. 서울에서는 이런 과일이 흔하지 않았던 때라 실컷 먹고 가리라는 마음도 있었다. 상큼하고 달콤한 그 향기와 맛은 지금도 내 후각과 미각을 자극한다.

 

   다음날 우리는 관광택시를 전세 내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제주 섬을 한 바퀴 돌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천지연 폭포였다. 서귀포는 제주의 다른 지역에 비해 지하수가 많이 솟아 폭포가 많은 편이었다. 그 규모나 경관 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 바로 천지연 폭포라고 가이드가 안내했다. 천지연은 하늘과 땅이 만나 이루어진 연못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불릴 만했다. 천지연 폭포 아래쪽에는 동백나무와 각종 난초가 울창하게 우거져 난대림을 이루고 있었다. 그곳에서 찍은 빛바랜 사진을 보니 마치 하와이섬에 가 있는 느낌이 든다. 그때 나는 하늘과 땅이 맞닿아 연못을 이룬 폭포처럼 우리 가정도 생명의 샘과 같은 폭포 줄기가 흘러넘치기를 바랐다. 서로 배려하며 행복이 고이는 연못이 되길 소원하며 그곳을 떠났던 기억이 새롭다.

 

   한국에서의 결혼 생활을 접고 가족과 함께 오리건주의 한 아파트에서 이민자로 사는 삶이 시작되었다. 작은아들이 초등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 처음은 외롭고 힘들었던 것처럼 우리 결혼 생활도 이국땅에 살면서 이웃과 언어 소통의 어려움을 겪었다. 멈추지 않고 서로를 더욱 알고 처한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이민 온 지 삼 년이 지난 후, 남편이 남가주 엘에이에 있는 무역회사에서 일했다. 이곳은 마치 다른 삶의 양식이 공존하는 도시와도 같았다. 남편은 볼리비아와 과테말라 무역업자와 자수 직물을 교역하면서 술과 축제를 즐기는 그들의 문화를 익히려고 노력했다. 중학교에 들어간 아들은 다양한 인종과 함께 배우면서 긍정의 마음을 심으며 자라났다. 주요 기관에서 제공되는 인터프리터의 도움으로 인해 일상생활은 더욱 편리하게 되었다. 학교, 병원, 법원, 시청 등에서는 다양한 언어의 소통이 가능했다.

 

   아침나절 내내 들여다보던 결혼 사진첩을 덮고 오후에는 남편과 함께 집에서 15마일 정도 떨어진 미션인(Mission Inn)’이라는 유적지를 찾았다. 타일로 된 지붕과 감각적인 디자인으로 지어진 붉은색 아치형 창문과 문이 눈에 띄었다. 이 건물은 위로부터의 압력을 지탱하기 위해 만든 석조기둥과 벨 모양의 장식이 특징이다. 이것은 스페인의 문화와 예술적 전통을 반영한 것이라고 했다.

 

   미션인은 미국 국립사적지(U.S. National Historic Landmark)인 동시에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카운티 사적지다. 평범한 숙박시설이 아니라 역사가 담긴 건물이었다. 1876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밀러(Christopher Columbus Miller)라는 토목업자가 건축했다. 그 후로 계속 증축되고 리모델링이 되면서 세계 이곳저곳에서 가져온 문화 공예품 등을 호텔에 전시하기도 했다.

 

   결혼기념일에 미션인을 방문하면서 다채로운 건축 양식이 섞인 미국의 한 풍경을 보았다. 이 건축의 다양성은 스페인의 풍부한 양식에서부터 모로코의 아름다움, 지중해의 매력, 중국의 고요함, 터키의 독특한 스타일, 바빌로니아의 고전적인 아름다움, 그리고 고딕-하와이언의 독특한 조화까지 녹아 있다며 안내인이 설명을 해준다. 미션인은 마치 건축의 역사를 걷는 것처럼, 과거의 기억이 아늑한 공간 안에 스며들어 있었다.

 

   이곳에서 한 권의 책을 펼쳐보듯 다양한 건축 양식과 문화가 함축된 건축물을 둘러보았다. 나는 직장 생활을 하는 중 타 인종과의 관계 속에서 그들의 삶과 낯선 문화를 알게 되었다. 대만 사람의 설날인 춘절, 스페인 사람의 성년식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웃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이 성전을 다시 찾은 것을 기념하는 하누카 행사와 아르메니아 사람의 유다 민족의식 등 다양한 문화를 존중하게 되었다. 남편과 나는 다른 인종도 내 가족처럼 품을 수 있었다.

 

   비록 오래된 건물이지만, 이 호텔을 둘러보며 결혼기념일에 고풍스러운 미션인 만의 분위기가 느껴져 내 마음도 흐뭇했다. 또한 소박한 뜰과 정원을 갖추고 있어 호텔 내부가 평화롭다. 여러 나라의 독특한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미션인을 다양한 문화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나의 결혼 생활과 견주어 보았다. 서로 다른 재료와 스타일이 조화를 이루듯이. 이국땅에서 남편과 나는 서로를 배려하며, 다른 인종과 더불어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며 살고 있다, 마치 조화롭게 잘 어우러진 미션인과 같이. 46년간의 우리들의 이야기를 되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