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행복한 하루 천국과도 같아라

                                                                                         유숙자

플라시도 도밍고가 LA 오페라의 뮤직 디렉터로 부임해 왔다. 세계적 테너로, 지휘자로 자주 대할 수 있게 된 것이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팬들에게 대단히 기쁜 일이다. 그의 공연은 언제나 성황을 이루며 더할 수 없는 열정 속에 펼쳐지고 있다. 그가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 신의를 중히 여기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음악인뿐만 아니라 팬들 간에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를 가리켜 성공적인 인간관계를 맺는 예술인이라고 평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기인 되지 않았나 싶다.

지난 1월 감기로 공연이 힘들어진 도밍고를 위하여 로베르토 알라냐가 오페라 무대에 대신 서 주었다. 3월 11일에 스테이플 센터에서는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도밍고를 위해서 LA 오페라 기금 마련 자선 공연을 열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대가들의 경쟁 세계에서 그런 배려를 받음은 도밍고가 살아온 삶이 어떠했나를 바로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근래에 그가 지휘하는 연주와 출연하는 오페라를 관람했다. 이제는 그의 모습도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보여주고 있으나 음성만큼은 아직 중년의 열정 속에 머문 음악 혼을 지니고 있다.

 

내가 플라시도 도밍고를 처음 본 것은 1981년 가을, 런던의 코벤트 가든에 있는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였다. 인생의 절정기, 40대 초반의 그는 투란도트에서 칼라프 왕자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그 후로도 그가 공연하는 오페라를 보고 있으면 그가 출연함으로써 작곡자가 의지하고자 했던 기대 이상의 효과로 연기하는 것 같다. 오페라 가수로서 외적 조건인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가 무대를 꽉 차게 만들고, 부드러우면서 박력 있는 가창력이 청중을 극 속으로 빨려들게 하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오페라는 타고난 목소리와 연기도 중요하나 그 못지않게 배역에 맞는 외모와 일치할 때 얻어지는 효과도 크다.

 

이제까지 관람한 오페라 중에서 가장 큰 감동을 받은 것은 라 트라비아타였다. 1983년 2월,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한 이 오페라는 베르디 특유의 선율성과 비극적 정서를 가장 짙게 띤 명작답게 그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 오페라는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만 329회를 공연한 작품인데 플라시도 도밍고와 일리에나 코트루바스가 알프레도와 비올레타를 맡아 열연했다.

1막의 전주곡이 피아니시모로 연주되기 시작하면 장내는 숙연해지고 이 오페라가 얼마나 비극적 요소를 지니고 있는지 묵시적 암시를 준다.

고급 창부 비올레타는 파리에 있는 그녀의 살롱에서 파티를 열고 있다. 시골 출신의 성실한 청년 알프레도는 친구의 소개로 비올레타와 인사를 나눈다. 원래 좋은 가문 출신인 비올레타는 폐병을 앓고 있다. 그녀는 손님들이 춤을 추기 위해 무도 실로 가고 있을 때 기침이 심하여 방에 남는다. 그때 오래전부터 먼발치에서 그녀를 흠모해 왔으나 적절한 기회를 찾지 못해 애태우던 알프레도가 사랑을 고백하는 아리아 “어느 행복한 하루, 천국과도 같아라.” (Un di felice, eterea) 를 부른다.

손님이 다 떠나고 비올레타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비올렛타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랑이 다가온 기쁨에 벅차 “아, 그대였던가” (Ah, fors e lui)를 부르며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애정을 표현하지만, 자신이 처한 현실 탓에 침울해진다.

 

때는 1840년경 파리의 고급 살롱.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가구며 장식품들이 그 시대의 풍물을 한껏 조명할 수 있어 무대 장치에서 이미 관람객에게 파리의 분위기에 푹 젖어 들게 한다.

귀공자 품격을 갖춘 도밍고와 온 힘을 다하여 열창하는 코트루바스. 알프레도와 비올렛타의 뛰어난 연기는 그 오페라를 관람하는 이들에게 황홀경으로 몰입하게 한다. 그것은 위대한 예술가에게서 느껴지는 청중을 압도하는 어떤 위력이다. 그 오페라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영혼의 전율을 맛볼 수 있는 체험, 교류하며 얻어지는 최고의 희열을 맛보았을 때, 그들과 감정이 일치했다면 지나친 표현이 될까?

 

노만 베일리가 제르몽의 아리아인 “프로반자 네 고향으로”(Di provenza il mar)를 부를 때 심금을 울리는 호소력에 청중들은 감동의 눈물이 났다. “아름다운 바다와 땅이 있는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자.” 부친의 절규는 부도덕한 아들의 행위가 가문의 수치가 되어 여동생 결혼을 막고 있다며 울먹였다.

 

폐병이 악화항여 죽어가며 피아니시모로 부르는 아리아 “지난날이여 안녕.”(Addio del passato) -오! 나의 하나님이시여,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 온 내가, 나의 슬픔이 끝날 때인 지금 죽기에는 너무 젊습니다.- 비올레타에 의해 다시 한번 촉촉한 가슴 저림으로 관중에게 스며든다.

 

베토벤이 죽은 다음 해인 1828년, 파리 음악학교에서는 베토벤의 교향곡 “운명”을 연주했다. 당시 청중의 한 사람이었던 파리 음악학교의 르쉐르 교수는 연주가 끝났을 때 흥분한 나머지 “모자를 쓰려 했으나 머리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이어 그는 “저런 음악을 만들면 안 돼”라고 말했다고 한다.

 

라 트라비아타를 감상한 내 기분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나 싶다. 위대한 성악가와 한 시대를 살며 그의 예술 세계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참으로 예술적 감동이란 얼마나 신비로운 것일까. 나는 가슴이 꽉 막힌 것 같은 아름다운 순간에 무대를 향하여 뭔가 표시하고 싶었으나 브라보를 외치며 꽃을 던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손뼉을 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공연이 끝났으나 쉽게 일어서지지 않았다. 무대 뒤로 달려가 그를 끌어안고 I’m in love with you라고 속삭여 주고 싶었다. 은총과 배려로 마련된 하루였다. 시간이 그냥 그 자리에 멈추었으면 싶었다. 커튼콜이 이어질 때마다 장내는 나의 히어로로 다시 한번 몰아의 경지에 이르렀다. 텅 비어 있는 이 층 홀의 마지막 손님으로 일어나며 마음은 온통 무대 저편을 향해 있었다.

새벽 2시, 달리는 차 창 밖으로 보이는 런던이 숙면을 하고 있다. 고요한 새벽 거리와 달리 내 가슴은 아직도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날 밤, 알프레도의 사랑 고백 “어느 행복한 하루, 천국과도 같아라”는 플래시도 도밍고를 향한 나의 고백이기도 했다.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