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가슴에
유숙자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제목의 오락 프로가 있다. 볼 기회가 많지 않아 자주 보지는 못해도 어쩌다가 기회가 닿으면 채널을 고정한다. 그 프로를 보고 있으면 삶, 인연, 인간관계, 정을 생각하게 된다.
고백하지 못하고 가슴앓이했던 짝사랑을 찾는다든지,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만 했던 첫사랑, 소식 끊긴 옛 친구, 은혜를 입은 스승님 등. 허다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을 본다. 반가운 해후가 있는가 하면 현재의 생활에 불이익이 올까 봐 출연을 사리는 소심 형도 있다. 찾으려는 사람이 이미 작고하여 눈시울을 적시게 하기도 한다. 때로는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까지 수소문하여 기어이 찾아내고야 마는 취재진의 열성이 대단하다.
근래에는 젊은 연령층이 주를 이루고 있으나 예전에는 대부분 한 분야에서 내로라고 성공한 연예인들과 방송인, 간혹 유명 인사가 나오기도 했다. 만남이 가지각색이어서 재미있고, 진행자의 감칠 맛 나는 익살이 감초 구실을 한다.
많은 만남 가운데 가장 보기 좋은 것이 스승을 찾는 제자의 마음이다. 가난하고 힘들어 끼니 걱정, 학비 걱정할 때 도와주셨던 선생님. 때로 도시락을 넌지시 건네주시고 박봉을 쪼개어 학비를 내주셨던 고마우신 선생님. 내가 사회에 첫발을 딛게 될때에 제일 먼저 스승님을 찾아뵙고 고마운 마음을 전해야지 하며 이를 악물고 노력했으리라. 춥고 배고팠을 때, 따스한 마음으로 다가와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푸신 스승님이 계셨다면 어찌 그분을 잊을 수가 있을까. 특히 우리 세대 같이 어려서 전쟁을 겪은 사람에게 전쟁과 가난은 공포 그 자체였다. 어려웠던 시절에 힘이 되어 주신 스승님을 찾는 옛 제자의 마음은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대접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나에게도 잊지 못할 스승님이 계시다. 여학교 때 선생님으로 내가 그분으로부터 무한한 사랑과 베풂과 겸손을 배웠다. 그 선생님께서 계셨기에 일찍이 생각하며 사는 삶을 터득하게 되었고 사색과 친해질 수 있었다.
W라는 아나운서가 어머니 같고 누이 같던 옛날 여자 친구를 찾으러 나왔다. 청년 시절 곁에서 보살펴 주고 필요한 때 있어 주고 외로울 때 기댈 수 있었던 편안한 친구. 이제 중년의 고개에서 문득 뒤를 돌아볼 때 살포시 떠오르는 그리운 얼굴.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며 지낼까.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친구 J 씨를 찾는다고 나왔다.
J 씨는 간호장교로 군 복무를 했고 마음이 무척 고운 친구라고 했다. W 어나가 논산 훈련소로 떠나던 날, 역까지 배웅나와 비상약을 챙겨주던 다정다감한 누님 같은 친구였기에 변함없이 고운 기억 속의 사람으로 간직되어 있다고 한다.
W 어나가 그녀를 새삼스럽게 찾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은 근래 치렀던 생방송 행사장에서 J 씨 비슷한 분을 보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사인을 받아가는 여인의 모습이 J 씨와 아주 흡사해, 행여나 하고 찾았을 때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후였다. 익살맞은 취재진은 W어나가 분명히 “잊지 못할 옛 친구’라고 했건만 “첫사랑” 하면서 민망하게 군다.
취재진이 분주하게 뛰어다닌 보람이 있어 J씨가 경북 청도에 산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런 산속에도 집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으며 J 씨의 집을 찾아 떠났다. 깊이 모를 산속으로 한참을 들어간 취재진의 시야에 드디어 그림 같은 집이 나타났다.
태곳적 고요가 감도는 곳, 구름과 바람과 새들이나 알고 잠시 쉬어 갈 듯한 비경. 울창한 숲과 나무가 어우러진 그곳에 그녀가 살고 있었다. 장원에 온 듯 착각하게 하는 저택에는 엘가의 행진곡 “당당한 위풍”을 생각나게 하는 두 마리의 셰퍼드가 위풍도 당당하게 버티고 서서 방문객을 살핀다.
정원이 넓어서인지 벨을 누르고 시간이 좀 지난 뒤에야 호남형의 한 중년 남성이 나온다. 그는 부인을 찾아온 취재진에게 더할 수 없이 호의적이다. 벽촌까지 찾아준 것에 대해 고마워하는 구수한 말씨가 이웃집 아저씨같이 친근감을 준다.
취재 며칠 후, TV는 사랑을 싣고 프로에 W 어나가 찾던 누님 같은 여자 친구가 남편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잔잔한 미소가 흐르는 편안하고 단아한 모습이다. 며칠 전에 W 어나의 행사장에 나와서 사인을 받았다는 말을 했다. 그녀는 왜 그를 아는척하지 않았을까. 젊은 시절, 단 한 번도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녀만이 아는 순수했던 시절의 감정이 조금은 떨림으로 남아 있던 때문일까.
진행자는 짓궂게 그녀의 남편에게 질문한다.
“부인의 첫사랑이 부인을 찾는다고 했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습니까.”
“참으로 기분 좋았습니다. 우리가 누구의 가슴에 아름답게, 혹은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오히려 망설이는 아내를 제가 설득했습니다.”
멋진 남편의 유쾌한 대답이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인연과 만나게 된다. 좋게 남아 있는 인연은 세월이 흘러도 아스라이 추억 속의 아지랑이 같이 아른거리고, 가슴 아렸던 인연은 지나간 상처의 괴로움 같이 아프게 한다. 그리움에서 멈춰진 인연은 언제까지나 그리움 속에서 아름다움으로 간직되어 있기에 자신의 인생 화폭에 파스텔 톤의 고운 그림 한 점을 그려 놓는다.
“TV는 사랑을 싣고”. 이 프로는 삶이 내재하는 의미를 되새기며 한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인간관계에 묘미를 보여 준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의 목숨 걸 만큼 애절했던 상대방이 세월이 흘러서인지 예전에 본인들이 생각했던 만큼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점이다. 아마도 순수했던 시절의 맹목적 사랑이어서 다분히 콩 꺼풀에 가려진 부분도 있었으리라. 어쨌거나 누군가의 가슴에 첫사랑이었건, 그리움의 대상이었던 간에 아름답게 남이 있어 불림을 받는 사람들은 행복할 것이다.
“너하고 결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죽어 버리겠어.” 짓궂게 내 주위를 맴돌며 으름장 놓던 예전의 그 사람들은 유명 연예인이 아니어서일까, 아직 나를 찾지 못해서일까. 한 번쯤 불림을 받을 것 같은 예감이, 예감으로만 머물고 있으나 TV는 사랑을 싣고를 볼 때마다 내가 주인공인 양 마냥 즐겁기만 하다.
누가 알겠는가. 그 어느 날 드디어 LA에서 찾았습니다.’ 하고 취재진들이 나를 찾아올는지. 그렇게 된다면 나도 살아가면서 묻은 때는 깊숙이 감추고 수줍은 듯 고개 숙이고 서서 내숭을 떨게 될는지. 나이 들어 더 볼품없어지기 전에 그런 날이 다가와 주기 바란다면 다분히 뻔 순이 과에 속할까?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