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목도장
유숙자
시원스레 옷을 벗는 가을 나무를 보며 나도 두툼하게 껴입은 옷을 과감히 벗기로 했다. 10여 년 전 이 집으로 이사할 때 홀가분하게 짐 정리를 했건만 어느새 다시 늘었다. 이번에도 둘 것 버릴 것 사이를 몇 번 오가면서 간추렸다.
어머니께서 생전에 보내 주셨던 편지 상자도 열어 보았다. 세월을 덧입어 편지지가 누렇게 변했고 글씨마저 흐릿하다. 찬찬히 들여다본다. 글씨가 살아 꿈틀거린다. '둘째야-' 부르시는 음성이 환청으로 들린다. 상자 구석엔 언제 넣어 두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작은 물건이 반쯤 투명한 종이에 싸여 있다. 도장이다. 아! 50여 년 전 어머니께서 주신, 내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래된 나무도장이다.
아버지께서 1964년 5월 어버이날에 돌아가셨다. 그날, 언니가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맛있게 잡수시고 2살 외손녀의 재롱을 한껏 즐기셨다. 아버지께서는 식곤증이 이시는지 잠시 눈을 붙이겠다 하셨다. 평소 낮잠을 주무시지 않을뿐더러 손님과 중요한 약속이 있어 넉넉한 시간이 아니었다. 얼마쯤 지나도 기침을 안 하시니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깨우러 들어가셨다. 아버지께서는 깊이 잠드신 듯 반응이 없으셨다. 점심 잘 드시고 거짓말같이 세 시간 만에 세상을 뜨셨다. 향년 57세.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어머니는 갑작스럽게 당한 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당되지 않으셨다. 이성과 감성 조율이 탁월하시고 사리 판단이 분명한 어머니였으나 남편을 잃은 슬픔은 그냥 지아비를 잃은 아낙의 모습이었다. 한동안 몸져누우셨다.
여름으로 접어들며 어머니는 차츰 기력을 회복했다. 아버지께서 청년 시절 개성을 떠나 서울에 정착하셨고 6.25 전쟁으로 친가와 왕래가 두절 되어 친족이 없기에 언제까지 슬퍼하고 계실 수 없었다. 하나에서 열까지 어머니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아버지가 생존하셨을 때 친구분들을 많이 챙기셨다. 그중에는 돈을 빌려간 분도 있었고 이모양 저모양으로 혜택을 누린 분도 있었으나 아버지가 안 계시니 서서이 멀어졌다. 우리 집 가훈은 '정직이 생명'이었다. 청렴하고 정의감이 투철했던 아버지. 중구 의용소방대를 설립하시고 지역 봉사에 앞장서신 분이다. 아버지 친구들이니 아버지 같으실 줄 알았다. 그 일을 겪으며 어머니는 성품이 변하셨다.
1년 후 아버지의 첫 추도식을 마치자 어머니는 우리 4남매를 불러 앉히셨다.
“엄마가 기도하면서 생각하고 결론을 내려 실천에 옮긴 것을 너희에게 통고한다” 우리는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해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세 딸 앞으로 목도장 한 개씩을 내놓으셨다.
"이것은 너희 이름이 새겨진 50원짜리 목도장이다. 내가 너희 의견을 묻지 않고 엄마 재량으로 조금 있는 유산을 막내에게 양도했다. 어제 서류에 도장을 찍었어. 동생 학업을 위해 누나들이 양보해다오. 둘째는 네 꿈을 접었으면 싶구나. 셋째는 졸업반이니 부모로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각자 생활 터전을 닦아 스스로 앞가림해주기 바란다.”
단 한 마디의 이의도 달지 못했다. 그저 어머니가 더는 실의에 빠지지 않고 굳건하게 우리 곁을 지켜 주시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40이 넘어서 출산한 아들이고 평생 집에서 살림만 하던 분이니 한정된 돈으로 아들 공부와 생계라는 이중고가 무거우셨으리라. 어머니가 독단으로 결정하여 통고하였지만, 유산이라는 말조차 생소했다. 어머니께서 하시는 일이니 다소곳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평소 정 많고 인자하시던 어머니와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어머니가 보내주신 마지막 편지를 본다. 1990년 12월 21일
“둘째야, 참 이상했다. 이번엔 너를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났어. 아마도 내가 갈 때가 가까웠나 보다-----."
1990년 가을 어머니 뵈러 서울 갔을 때 이번엔 내가 너를 보는 마지막일 것 같다시며 눈물을 보이셨다. 떠나기 전날 밤 어머니와 나란히 누웠다. 한동안 이런저런 말씀을 나누다가 말문이 막혔다. 우리는 등을 돌리고 숨을 죽이며 베개를 적셨다. 일곱 달 후 어머니는 그렇게 사랑하던 우리 4남매를 남겨 두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지금도 내 기억 속에는 젊고 아름답던 시절의 어머니와 세월의 흔적이 새겨지셨던 노년의 모습이 선연히 남아 있다. 새벽이면 우리 4남매를 위하여 기도하시던 어머니의 기도 소리에 잠이 깼고 밤이면 감사 기도를 들으며 잠들었다.
때로 어머니의 기도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어머니의 신앙 고백이다. 어머니의 기도가 열매 맺어 축복의 통로로 이어져 자녀 손에 이르기까지 온 가족이 믿음으로 하나 됨을 감사한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51년, 어머니도 25년이 지났다. 긴 세월을 지나는 동안 어느 형제도 목도장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인 들 마음 편하셨을까. 단산할 나이도 한참 지나 귀하게 얻은 아들. 남존여비 사상이 강하고 아들을 낳지 못하면 죄인처럼 살던 시절이었으니 시어른께, 먼저 떠난 남편에게 며느리로 아내로서 책무를 다하려 모진 결정을 내리셨으리라.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남동생은 어머니의 기도와 정성 속에 전 교육 과정을 마치고 대한민국 경제계의 일익을 담당했다.
50년 세월을 담고 있는 도장에서 어머니의 체취와 아픔이 향기로 피어난다. 가슴을 에우는 사연들이 침묵 속에 잠긴다.
가을이 익어간다. 나뭇가지마다 하늘이 스미고 잎과 열매를 다 떨군 여백의 빈자리에 허공을 가득히 채운다. 내 가슴 눈물 어린 기슭에 잊힐 수 없는 그리움으로 어머니가 서 계시다.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