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스완
유숙자
고전 발레의 백미는 ‘백조의 호수’다.
차이콥스키의 음악과 함께 펼쳐지는 환상의 세계. 발레리나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동경의 대상이 백조의 여왕이다. 백조의 여왕을 맡게 되면 프리마 발레리나로서 입지를 굳히는 것은 물론 어느 발레에서 나 주역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음이 입증된다.
발레리나에게 처음 주어지는 배역이 무용수(Artists)다. 좀 발전하면 코리피(Coryphees). 솔리스트 (Solo Artists)까지 오르려면 7~8년 이상, 주역인 프린서펄(Principals)까지는 10년 이상 걸린다. 이것은 특별히 재능을 타고난 무용수에 해당하는 말이다. 평생 군무만 추다가 끝나는 발레리나들이 부지기수다. 발레는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오로지 주역은 남녀 각각 한 사람 뿐이어서 경쟁이 치열하다.
무용수는 매일 혹독한 연습을 하기에 발톱이 곪고, 발 모양이 변형되고, 인대가 찢어지고, 어깨뼈를 삐고, 허리디스크 등 상처를 입는다. 과도한 연습으로 육체적 고통이 심하지만, 그것마저도 예술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인다. 일단 무대에 오르면 통증은 사라지고 제단 위의 제물처럼 타오를 뿐이다. 시즌마다 배역이 발표되는 날은 극도의 긴장과 초조로 살이 내린다. 자신이 원했던 배역이 배당되는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최근에 <블랙 스완(Black Swan)>이라는 영화를 감상했다.
이 영화는 ‘분홍신’이나 “터닝 포인트” 같이 순수 발레 영화가 아니고 발레에 색다른 ‘사이코 섹슈얼 스릴러’를 가미했다. 백조의 호수 3막에 나오는 흑조 오띨의 춤과 연기에 중점을 둔 강렬하고 관능적인 영화다. 주인공 니나는 발레리나로 완벽의 성취를 위해 집념하다가 정신 분열을 일으킨다는 내용이다.
뉴욕 발레단에 소속된 니나(나탈리 포트먼)는 전직 발레리나 출신인 엄마 에리카(바바라 하쉬)의 적극적인 보살핌 아래 삶의 전부를 발레에 두고 있다. 에리카는 니나를 최고의 발레리나로 만들려고 정성을 쏟는 반면, 매사에 깊숙이 관여한다.
예술 감독 토마스 르로이(뱅상 카셀)는 주역인 베스(위노나 라이더)를 전격적으로 은퇴시키고 새 시즌에 새롭게 각색한 ‘백조의 호수’에 니나를 발탁한다. ‘백조의 호수’는 백조가 흑조의 역까지 1인 2역을 맡는다.
“내가 뽑혔어요. 엄마. 들었어요? 내가 새 주인공이에요. 곧 집에 들어가지만, 미리 알려 드려요.”
니나는 격정을 주체할 수 없어 눈물을 펑펑 쏟으며 엄마에게 알린다. 그 눈물, 그 기쁨을 나는 안다. 발레리나라면 누구나 경험해 봤을 것. 새 시즌이면 가슴이 바작바작 타들어 가던 결정의 순간을. 가장 감동적인 이 장면에서 나도 눈물을 펑펑 쏟았다.
니나는 순수하고 나약한 백조는 완벽하게 연기할 수 있으나 관능적이고 도발적인 흑조 연기는 어딘지 미흡하다. 니나와 라이벌 관계인 릴리(밀라 쿠니스)는 니나처럼 정교한 테크닉을 구사하지 못해도 무대를 압도하는 카리스마와 관능적 매력을 뿜어내어 은근히 그녀와 비교된다. 이 영화는 니나가 흑조의 연기에 대한 중압감에 휩싸여 자신을 잃고 자아가 분열되는 과정을 그렸다. 어리고 성품도 여리기에 자신에게 주어질 어떤 운명 같은 것에 불안하다. 그런 강박관념 속에 있기에 연습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환상과 괴상한 사건에 사로잡힌다.
니나는 완벽함, 아주 짧은 순간 동안만 존재하는 완벽함을 원한다. 예술가가 완벽하려면 스스로 자신을 파괴해야 한다. 니나는 흑조가 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이해할 수 없는 내면의 거부가 끓어오른다. 스타 덤에 대한 압박과 이 세상 모두가 자신을 파괴할 것 같은 불안에 시달린다. 백조와 흑조의 상반된 연기를 완벽하게 하고 싶은 욕망에서 겪게 되는 비현실적인 내면의 경험과 싸우게 된다. 릴리가 니나의 내면에서 원하는 인물의 표상이라면, 토마스 르로이는 니나가 릴리 같은 관능미를 자연스럽게 표출하도록 가차 없이 몰아붙이는 인물이다.
“너는 아름답지만 연약하고 겁이 많지. 4년간 널 봐왔는데 모든 인물을 완벽하게 소화하지만, 도전적인 것이 없잖아. 춤만 잘 추면 뭘 해, 완벽함과 통제는 달라. 테크닉을 버릴 줄도 알아야 해. 테크닉을 넘어선 도전이 필요해. 자신을 놀래줘야 관객이 놀란다고. 배역의 틀을 벗어나야 해. 네 욕망을 표현해. 더 강하게 유혹적으로. 관능에 네 몸을 맡겨라. 넌 백조만을 표현할 수 있어. 자유로운 표현이나 섹시함이 부족해. 왕자뿐만 아니라 관객을, 전 세계를 유혹해 보란 말이야. 릴리의 몸짓을 봐, 자연스럽고 관능적이지 않니. 너처럼 꾸미는 게 아니야. 네가 두려워할 사람은 너 자신뿐이야.”
토마스는 니나에게 흑조의 연기를 혹독하게 훈련 시키지만, 혐오감만 인다. 인간과 예술의 본 모습을 낱낱이 꿰뚫어 보려고 온 힘을 다하나 마음뿐이다. 니나는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환청들로 괴롭다.
‘그 역이 널 망치고 있어.’
엄마 에리카의 울부짖는 음성이 귀를 때린다.
‘너도 결국 나처럼 될 거야’ 주역을 빼앗긴 베스가 퍼붓는 저주가 가슴을 할퀸다. 베스는 니나의 정신세계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녀를 통해 니나는 자신 앞에 펼쳐질 미래를 예감한다.
이 영화에서 토마스는 오직 발레만을 생각하여 발레리나를 소모품처럼 이용하고 버리는, 희생자들은 신경을 쓰지 않는 인물이기에 니나를 향한 베스의 울부짖음이 타당성 있다.
급기야 위기가 닥쳐 자신이 누구인지 혼란스러운 것은 물론 자신과 다른 사람 사이의 경계가 흐려진다. 정체성을 잃어가며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곳곳에서 보게 된다. 자신과 닮은 사람, 불가사의한 만남, 고통이 넘쳐 나는 어지러운 세상에 갇혀 혼란을 겪기 시작한다. 니나가 주변의 모든 체계에 반항하기 시작하면서 편집증이 나타난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혹은 자신이 제정신 인지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분열된 정신 상태에 빠진다.
영화 전체를 통하여 니나가 웃는 모습이 거의 없다. 그녀의 표정은 언제나 불안하고 초조하며 무언가에 쫓기는 듯하기에 관람객들이 촌각의 긴장도 풀 수 없게 만든다. 금방이라도 무슨 불길한 일이 터질 것 같아 신경 줄을 팽팽하게 당긴다.
마침내 니나는 처절하게 흑조를 춤추는 데 성공했다. 그녀의 몸속에서 끊임없이 괴롭히던 정형의 틀, 편집과 아집의 가시를 뽑고 나서 비로소 완벽하게 흑조로 변신했다.
<블랙 스완>이 호평을 받는 것은 나탈리 포트먼의 완벽한 연기와 우아하고 아름다운 발레리나로의 변신에 있다. ‘백조’와 ‘흑조’라는 상반된 캐릭터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에 더하여 완벽한 커리어 구축을 위한 열정, 실패에 대한 두려움, 홀로 서기, 부모와의 갈등, 성에의 탐구와 흥미 등을 스릴러 넘치는 전개로 독창적인 캐릭터가 돋보이는 각본을 들 수 있다. 특히 백조와 흑조의 상반된 성격을 가진 나탈리 포트만과 밀라 쿠니스의 극 중 라이벌 관계는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는 긴장감을 더한다. 여기에 기량이 뛰어난 최고의 연기파 배우 뱅상 카셀, 바바라 허쉬가 니나의 주변 인물로 등장, 아름다움과 신비와 두려움이 최면 상태에서 혼합된 분위기를 더해준다. 그녀가 심리학을 전공했기에 영화에서 시시 각각으로 변하는 성격 묘사를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차이콥스키의 원곡을 영화의 색감에 맞게 편곡해 일관된 긴장을 유지해가는 음악이 우아하면서도 화려하고 요염한 매력을 한껏 뿜어낸다. 성공을 꿈꾸며 완벽을 추구하려는 발레리나의 시련과 광기, 라이벌을 향한 질투와 동경을 그린 극한의 심리극으로, 인간에게 감춰진 양면 성과 변신을 위한 몸부림을 통해 긴장감 넘치는 스릴로 관객을 유혹한다.
<블랙 스완>은 “백조의 호수”처럼 우아함과 서정성을 한껏 살린, 명성에 걸맞은 신비하고 아름다운 발레 영상과 전혀 다르다. 땀과 불안이 팽배한 발레계의 감춰진 뒷모습에 작위적인 면도 삽입한 스릴러 형식의 전개 방식을 도입했다. ‘백조의 호수’에서 흑조가 백조의 연인인 왕자를 빼앗기는 해도 이 영화처럼 관능미가 도입되지 않는다. 다만 과감한 표정 연기가 조금 다를 뿐이다.
나탈리 포트만은 어릴 때 발레를 배운 것이 도움되었다. 그녀는 발레의 맛과 멋과 흐름을 알기에 프리마돈나처럼 표현할 수 있었다. 1년 6개월간 전력을 다해 수백 번의 리허설과 15번을 실제의 공연처럼 연속적으로 연습했어도 전공자처럼 정교하게 할 수 없었다. 고난도가 있어야 하는 동작은 22년간 ‘아메리카 발레 시어터’의 현역 무용수인 주역 ‘사라 레인’(Sarah Lane)이 대역을 했다. 다만 카메라의 기술에 의해 일반인들이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밀착시켜 두 사람의 동작을 하나로 만들었다.
나는 <블랙 스완>을 10여 차례 이상 감상했다. 머릿속에 전 스크린이 가득 펼쳐져 있는데도 막상 글을 쓰려 하니 초안을 잡기 어려웠다. 분명 스토리가 있는데 한 장면, 장면이 맞춰야 할 퍼즐 조각같이 복잡했다. 아름답고 화려하게 펼쳐지는 발레 장면을 보면서도 기분은 영 으스스했다. 너무나 강하고 충격적인 장면이 많았기에 불안감이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니나의 비극은 자신을 자기 밖의 형상으로 보는 데 익숙해져 있지 않았다. 밖으로부터 안으로 자기를 바라본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다른 사람의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는데 익숙해져 비극을 맞게 된다.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몸 안으로 되돌아가 남이 아닌 나를 바로 인식하며 자기를 위해 즐거움을 찾는 것이다. 뱅상의 표면적인 성적 희롱은 가혹하리 만치 냉정한 또 다른 훈련의 과정이다.
프리마 발레리나가 인간의 외적인 것에서 위안을 찾는다면 결코 무용수로서 성공할 수 없다. 삶 자체가 공연과 훈련이기에 하루를 쉬면 자신이 알고, 이틀을 쉬면 비평가가 알고, 사흘을 쉬면 관객이 안다는 일념 속에서 이루는 비상만이 최선이다.
<블랙 스완> 젊은 발레리나의 열정과 욕망, 열망과 갈등, 현실과 환상, 의식과 무의식, 지나친 모정이 공존한다. 육체가 자기표현의 수단인 특수 세계에서 선택의 축적이 성숙한 예술가로 만들어 주는 열쇠임을 이 영화는 말해 준다.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