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죽 피리
金秀映
가죽 피리는 친구가 나에게 붙여준 별명이었고 가죽 나팔은 내가 오빠에게 붙여준 별명이었다. 웃지 못할 사연이 있으니…원래 피리는 악기 중에도 매우 섬세한 음을 내는 악기로서 피리 소리를 듣게 되면 향수에 젖게 된다. 내가 자란 시골에서는 버들피리 등 나뭇잎을 접어서 피리 소리를 흉내 내는 경우가 많았다. 피리도 여러 종류의 피리가 있겠지만 나는 어린 시절 친구에게서 들은 가죽 피리와 오빠의 가죽 나팔을 잊을 수가 없다.
육이오 전쟁이 끝난 뒤 수년간 농부들이 농사를 지어도 늘 식량이 부족하였다. 쌀밥은 아예 구경하기가 어려웠고 기껏 보리밥이 고작이었다. 보릿고개가 다가오면 곡식이 떨어져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우리 집에서도 항상 여자들은 보리밥 먹기가 일 수였다. 어머니는 항상 하얀 쌀밥은 아버지상에 올려놓으셨다. 그때는 쌀이 귀했고 보리쌀은 흔했다. 사실은 보리밥이 쌀밥보다 더 건강식이고 최고의 보양식인데도 그 당시엔 쌀밥이 최고였다. 보리는 부 더럽지가 않고 깔끄러워 목구멍으로 삼키기가 어려워 나도 싫어했다. 옛날 보리는 통보리여서 항상 푹 삶아야 했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 늘 보리밥을 먹고 다녔는데 나는 보리밥을 먹으면 소화가 잘되어 늘 방귀가 나와서 교실에서 공부할 때 큰 고민이었다.
수업시간에 수업에 열중하다가도 방귀를 참느라 안절부절못할 때가 잦았다. 하루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한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강의를 열심히 친구들이 듣고 있었다. 나는 방귀를 참다못해 아주 귀여운 방귀 소리를 ‘뽕-‘하고 내고 말았다. 조용한 교실 안에서 여기저기서 킥킥 웃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나는 당황하여 얼굴이 홍당무 우가 되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학생들이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계속 웃기 시작하자 내 옆에 앉아 있던 짝궁이 갑자기 벌떡 일어서 하는 말이 ‘여러분 가죽 피리 소리가 참 아름답습니다. 전쟁 후 웃음을 잃은 우리에게 웃음을 갖다 준 나의 짝꿍에게 박수를 보냅시다.’ 이 소리를 듣고 있던 국어 선생님은 맞장구를 치면서 ‘암 그렇고 말고, 아름다운 가죽 피리 소리지.’ 하시더니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안간힘을 쓰시는 모습이 완연했다.
선생님은 방귀쟁이 며느리를 맞이한 시아버지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갓 시집온 새댁이 날이 갈수록 얼굴이 노랗게 뜨고 병색이 완연하여 하루는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어디 아프냐며 물어보았다. 처음에는 대답을 안 했지만 계속 물어보는 시아버지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시집와서 방귀를 못 뀌어 가스가 배속에 차서 많이 아프다고 실토를 한 것이었다.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집안에서 방귀를 뀌어도 괜찮으니 마음껏 뀌라고 하자 그동안 참고 참아왔던 방귀가 나오면서 우렁찬 소리로 대포 쏘듯 불어댔다. 얼마나 방귀 소리가 요란하고 위력이 대단 한지 시부모가 공중에 날아다니며 박치기하는 소동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결국, 시아버지는 며느리의 방귀의 위력에 놀라 암행어사가 오면 죄인들을 다루는데 방망이를 갖다 대고 방귀를 뀌게 하였다. 죄인들이 방망이에 매를 맞고 혼쭐이 나서 죄를 다시는 짓지 않아 고을이 평화로웠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시댁은 방귀쟁이 며느리 덕분에 복을 받고 잘 살았다는 것이다.
선생님의 얘기를 다 듣고 난 후 학생들은 갑자기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선생님은 나의 난처한 처지를 변명이라도 하듯 방귀쟁이 며느리 얘기를 학생들에게 들려줌으로 방귀 뀌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임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선생님 앞에 버리장머리 없이 방귀를 뀌었다고 야단을 맞을 줄 알았는데…유머러스한 얘기로 학급 분위기를 확 바꾸어 놓은 선생님의 위로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나에게 잊히지 않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나의 별명은 가죽 피리로 불리게 되었다.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운동하다가 ‘가죽 피리’하고 큰 소리로 나를 부르면 다른 학급의 학생들이 내가 가죽으로 된 피리를 부는 줄 알고 ‘피리 한 번 불어 봐’ 하고 졸라대면 나는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궁지에 몰린 나를 친구의 기발한 기지로 구해 낸 친구가 정말 고마웠다. 내 짝꿍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고마우신 선생님은 아직 살아계신지 그때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재작년 오월에 큰 오빠가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가 한국전쟁 와중에 돌아가신 후 큰 오빠가 아버지 대신 동생들을 보살피며 교육을 위시하여 집안의 크고 작은 대소사를 도맡아 돌보아 주셨다. 동생들로부터 존경받는 믿음직스러운 큰 오빠였다. 사회적으로도 항결핵 운동으로 큰 공헌을 하여 대통령 표창까지 받으셨다. 나는 무릎관절 수술 때문에 장례식에 참석을 못 해 몹시 슬프고 안타까웠다. 위로를 받을 길이 없었지만, 오빠에 대한 가지가지 추억을 떠올리며 추모하게 되었다. 그 많은 추억 가운데 잊히지 않는 추억은 오빠도 나처럼 방귀를 아주 잘 뀌셔서 온 가족을 많이 웃긴 사실이다. 평소에 장이 좋지 않으셔서 자주 방귀를 뀌셨는데 몸을 들썩이면서 큰 소리를 내는 방귀여서 온 가족이 한바탕 웃는 소동이 벌어지곤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집권할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이 모 씨가 이승만 대통령이 방귀를 뀔 때마다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아첨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대한민국 국민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는 말이 널리 국민 사이에 애용되고 있었다.
오빠가 방귀를 뀌실 때마다 나는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하면 모두가 한바탕 웃곤 했다. 오빠의 방귀 소리는 크고 우렁찼다. 그 후 나는 오빠의 방귀 소리를 가죽 나팔이라고 별명을 지었고 나의 가죽 피리에 대한 사연을 오빠에게 설명해 드렸다. 오빠는 흥미롭게 듣고 계시다가 그래도 ‘어른들 앞에 방귀 조심해야 한다.’라며 지긋이 웃으셨다. 온 가족이 모여도 더는 가죽 나팔을 들을 수 없어 웃음이 사라지고 말았다.
올해 5월 21일이 큰 오라버니가 돌아가신지 2 주기 되는 기일이다. 동생 김영교 시인은 남편과 함께 한국에 나가 온 가족이 모이는 기일에 산소에 가서 오라버니의 사랑을 기리며 마음껏 울 테지…나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온 가족과 함께 산소에 못 가는 이 안타까움을 오라버니는 알고 계실까!
국어 선생님은 아직도 살아 계실까.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선생님이 몹시 그리워진다. 내 단짝이었던 친구는 어디서 살고 있는지 안부가 몹시 궁굼하지만 찾을 길이 없다. 아 고마운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