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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을 십자가로 무장시키는 교회가 되라

 

성도들을 십자가로 무장시키기 위한

훈련과 가르침

— 말의 신앙에서 삶의 신앙으로 나아가는 길
 

“성도들을 십자가로 무장시키라”는 말은 단순한 신앙적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교회의 교육 방향이며 목회의 본질이며 제자도의 핵심이다. 십자가로 무장된 성도는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로 무장시키는 일은 감동을 주는 설교 몇 편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체계적인 가르침과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형성된다.
 

다음은 실제 교회 현장에서 적용 가능한 구체적인 훈련의 방향들이다.

 

1. “자기부인”을 가르치는 신앙훈련

 

십자가의 첫 번째 내용은 자기부인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앙교육의 많은 부분은 “자기실현” 중심으로 흐르고 있다. 십자가는 자기실현 이전에 자기부인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억울한 상황에서 참는 훈련
손해를 감수하는 선택
인정받지 못해도 봉사하는 태도
옳아도 다투지 않는 절제

이러한 훈련은 교리교육보다 더 실제적인 십자가 교육이다.

한 교회에서는 봉사자를 세울 때 먼저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6개월 봉사”를 요구했다. 그 결과 직분은 명예가 아니라 헌신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훈련이다.

 

2. “회개”를 회복시키는 말씀훈련

 

십자가는 죄를 가볍게 만드는 상징이 아니라 죄를 심각하게 보게 만드는 사건이다.

십자가로 무장된 성도는
죄를 합리화하지 않는다
죄를 문화로 포장하지 않는다
죄를 습관으로 방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교회는 반드시 회개를 가르쳐야 한다.

예를 들어....
정기적인 회개기도 시간
말씀 묵상 후 적용 나눔
공동체 안에서의 영적 점검
이러한 훈련은 성도를 영적으로 민감하게 만든다.

십자가 없는 신앙은 자기합리화를 낳지만
십자가 중심 신앙은 자기성찰을 낳는다.
 

3. “희생적 섬김”을 생활화하는 공동체 훈련

 

십자가는 사랑의 절정이다.
따라서 십자가로 무장된 성도는 섬김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이름 없이 봉사하기
어려운 성도 돕기
지역사회 섬김 참여
선교 헌금 생활화
 

어느 교회에서는 청년들에게 매달 일정 금액을 정해 “익명 사랑헌금”을 실천하게 했다. 그 결과 헌금이 의무가 아니라 사랑의 표현이 되었다.
 

십자가는 헌신을 부담이 아니라 기쁨으로 바꾼다.

 

4. “고난의 신학”을 가르치는 설교훈련

 

오늘 교회의 약점 가운데 하나는 고난을 설명하지 못하는 데 있다.
 

십자가는 고난을 실패로 보지 않는다.
십자가는 고난을 하나님의 통로로 이해한다.
 

따라서 성도들은 배워야 한다.
왜 믿는 사람에게도 고난이 오는가
왜 순종이 항상 형통으로 이어지지 않는가
왜 하나님은 기다리게 하시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성도는 번영 중심 신앙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러나 고난의 의미를 이해한 성도는 흔들리지 않는다.
 

5. “순종 중심 신앙”을 훈련하는 제자훈련

 

십자가는 순종의 상징이다.

십자가로 무장된 성도는

“이해되기 때문에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이라서 순종하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말씀 적용 기록하기
한 주간 한 가지 순종 실천하기
순종 간증 나누기
이러한 훈련은 말씀을 정보가 아니라 삶으로 바꾸어 준다.
 

6. “십자가 중심 정체성”을 세우는 목회 방향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성도는 성공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성도는 십자가로 성장한다.
 

따라서 교회는 성도들에게 반복해서 가르쳐야 한다.
 

"당신은 축복받기 위해 부르심 받은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기 위해 부르심 받은 사람이다."

 

이 정체성이 세워질 때 교회는 강해진다. 성도는 흔들리지 않는다. 신앙은 깊어진다.
 

오늘 교회가 다시 회복해야 할 교육의 핵심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십자가다.  행사가 아니라 십자가다.  분위기가 아니라 십자가다.  그러므로 지금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이것이다.  "성도들을 십자가로 무장시키라" 는 명령이다.24-03-10-1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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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장 1~11절.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2,000년 전 오늘, 예루살렘 성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모여든 수많은 인파로 가득 찼습니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길 위에 겉옷을 폈습니다. 마치 개선장군을 맞이하듯 뜨겁게 환호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환호 소리 뒤에 흐르는 침묵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왕의 귀환'을 보며 기뻐했지만, 예수님은 그 길 끝에 놓인 '십자가'를 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1: 만물의 주인이 선택하신 낮은 자리

 

예수님은 입성 전 제자들에게 맞은편 마을로 가서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3절)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발견합니다.
* 주권: 세상의 모든 것이 주님의 소유라는 선포입니다.
* 겸손: 그러나 그 주권을 가진 왕께서 택하신 것은 위엄 있는 군마가 아니라, 볼품없는 '어린 나귀'였습니다.
 

예수님은 슥 9:9의 예언을 이루시며, 힘으로 억누르는 왕이 아니라 평화와 겸손으로 다스리는 왕임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으면서 여전히 세상의 '군마'를 부러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나귀'와 같은 낮은 마음을 요구하십니다.

 

2: 군중의 '호산나'와 우리의 기도

 

길을 메운 군중들은 외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9절)
 

'호산나'는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들의 외침은 간절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간절함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의 구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 그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길 원했지만, 예수님은 죄의 압제에서 우리를 건지려 하셨습니다.

* 그들은 빵의 문제를 해결해 줄 왕을 원했지만,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 되어 자신을 주려 하셨습니다.
 

내 기대와 하나님의 계획이 다를 때, 우리는 여전히 "호산나"를 외칠 수 있습니까? 내 뜻대로 되지 않아도 주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것, 그것이 종려주일을 맞이하는 성도의 바른 자세입니다.

 

3: 죽음을 향한 가장 용기 있는 행진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입성이 '죽음을 향한 행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체포되고, 채찍질당하며,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걸음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왜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해야만 부활이 있고, 주님이 죽으셔야만 우리가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종려주일의 환호는 곧 다가올 십자가의 고난을 이겨내기 위한 주님의 처절하고도 당당한 '사랑의 선포'였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삶

 

이제 내일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사람들의 환호는 며칠 지나지 않아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저주로 변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변덕스러운 군중들까지도 품으시며 묵묵히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도 주님의 뒤를 따라갑시다.

세상의 영광보다는 주님의 발자취를 묵상합시다. 내 욕심의 종려나무 가지를 내려놓고, 주님이 지셨던 그 사랑의 십자가를 깊이 생각하며 부활의 아침을 기다리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24-03-10-16.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