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렌스키는 1978년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는 홀로코스트 희생자다.
아버지는 컴퓨터공학 교수였고, 어머니도 공학자였다. 몽골에서 근무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몽골에서 살다 어머니 건강 문제로 4년 만에 귀국했다.
젤렌스키와 아내 올레나 - 2019년 대선 토론회에서 부인과 함께 포즈를 취한 젤렌스키.
“친구에게 이를 드러내고 웃는 사람이 친구에게 우유를 건네는 사람보다 낫다”고 탈무드는 강조한다.
랍비 샴마이는 “모든 사람을 쾌활하게 맞이하라”고 가르치며, 자신의 우울함과 침체된 분위기로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은 ‘죄악’이라고 했다. 유대인의 인생관은 할 수만 있다면 “아낌없이 즐기라”는 것이다.
이런 교육 덕분에 젤렌스키는 어려서부터 밝고 긍정적인 기운으로 남을 웃기는 재주가 탁월했다. 10대 때는 운동을 좋아해 역도와 레슬링을 배웠다.
한편 예능에도 소질이 있어 춤도 잘 추고 학교 앙상블의 기타리스트로도 활동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TV 코미디 프로그램에 출연한 젤렌스키는 1997년 코미디 경연 대회에서 우승하며 주목받는 코미디언이 되었다.
그는 19세에 ‘크바르탈95′라는 연예 기획사를 설립해 자신이 주연을 맡아 사회 풍자 드라마와 영화를 여러 편 제작했다.
그의 드라마는 모스크바를 비롯해 구 소련 공화국들에서 공연되었다. 젤렌스키는 일과 공부도 병행해 명문 키이우(키예프) 국립경제대학에서 경제학 학사와 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6년에는 댄스 경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2015년부터 방영된 ‘국민의 종’이라는 51부 작 대하드라마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이 드라마는 부패한 우크라이나 사회를 풍자적으로 비판했다. 제작자 겸 주연인 젤렌스키는 드라마에서 고등학교 역사 교사 역할을 맡아 학생들 앞에서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를 성토했다.
이 장면을 한 학생이 몰래 촬영해 온라인에 올리는 바람에 역사 교사는 국민에게 큰 인기를 얻게 되고,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된 그가 부패 정치인들을 몰아낸다는 게 드라마 줄거리다. 시청자 수가 국민의 절반에 가까운 2000만명에 이를 정도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이후 젤렌스키는 ‘국민의 종’ 출연진과 함께 같은 이름의 정당을 2018년 창당해 대권 주자로 부상했다. 기존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이 높아, 젤렌스키는 새로운 인물이라는 점을 어필하여 현직 대통령을 3배 가까운 차이로 꺾으며 당선되었다.
TV 드라마가 현실이 된 것이다. 2019년 41세의 최연소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나는 평생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해 왔다. 그것이 나의 사명이었다. 이제 나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최소한 울지 않도록 모든 것을 다할 것이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피란민 구조하는 우크라이나軍 -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유모차를 들어 옮기며 피란민들을 돕고 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 인근 도시인 이르핀은 러시아군 공습으로 다리가 파괴되고 민간인 사상자들도 잇따르고 있다.
젤렌스키는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온건 중도파로 분류됐다. 친서방파와 친러파로 양분된 정치 구도에서 그는 러시아계 유대인이라는 혈통 문제까지 겹치며 양쪽에 포위당한 처지였다. 하지만 젤렌스키는 정파 문제에 연연하지 않고 안보 외교에 총력을 기울였다.
취임 후 첫 정상회담은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가지며, 돈바스 전쟁에 대한 문제를 의논했다. 다음으로 독일을 방문해 메르켈 총리와 러시아-독일을 잇는 가스관 문제 등을 논의했다. 이후 유엔 총회에 참석하는 길에 트럼프와도 만났다. 전반적으로 적극적 친서방 행보를 보여 러시아의 푸틴과 앙숙이 되었다.
올해 초부터 러시아가 18만 대군을 동원해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것이라는 예측이 쏟아지자 그는 서방에 도움을 요청했다.
2월 19일 뮌헨에서 열린 안보회의에 참석해 러시아와 맞서온 우크라이나의 희생, 유럽과 나토(NATO)의 이기적 태도를 비판하며 유럽 안보 구조의 재구축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가능성에 대한 서방의 대응이 부족하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젤렌스키의 독일 방문은 그가 우크라이나를 벗어난 틈을 타 러시아가 공격할 수 있다는 미국 측 우려에도 불구하고 강행한 것이다.
그는 “우방국들의 지지가 있든 없든 우리는 조국을 지킬 것”이라면서, 무기 등의 지원에 감사하지만, 이는 우크라이나가 구걸해야 하는 사안이 아님을 강조하고 “이는 우크라이나가 머리를 조아려야 할 게 아니라 우크라이나가 크림반도 합병 이후 8년간 유럽의 안보를 위해 방패 역할을 해온 기여”라고 주장했다.
2월 24일 드디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역에 미사일 폭격을 가하며 쳐들어왔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18세부터 60세까지 국민 총동원령을 내렸다. 같은 날 그는 EU 정상 회의에서 5분간 영상 연설을 통해 지지를 촉구했다.
“오늘 제가 살아있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고 운을 뗀 그는 “우리는 지금 유럽의 이상(理想)을 위해 죽어가고 있다”고 호소했다.
같은 날 저녁에 올린 연설 영상에서 그는 우크라이나를 지원하지 않으면 “내일 전쟁이 당신들의 문을 두드릴 것”이라며 서방 국가의 지도자들에게 경고했다. 그의 호소와 경고는 즉시 효력을 발휘했다. 서방은 즉각 러시아 제재에 들어갔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각종 지원이 시작되었다.
전쟁 발발 후 러시아가 3차례 이상 젤렌스키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다. 그는 러시아의 최우선 목표가 자기 제거임을 알면서도 수도 키이우를 끝까지 사수하겠다고 밝히며 결사 항전을 다짐했다.
러시아가 “젤렌스키가 수도를 탈출했다”는 허위 보도를 하기 시작하자 그는 SNS를 통해 수시로 근황을 알리며 국민들을 단결시켰다.
“저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무기를 내려놓지 않을 겁니다. 조국을 지키겠습니다. 우리의 진실은 이곳이 우리 땅, 우리 조국, 우리 후손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모든 것을 지키겠습니다.”
그는 하루 3시간 정도만 자며 강인하고도 치밀한 모습으로 전쟁을 진두지휘했다.
3월 1일 젤렌스키는 유럽 의회에 화상 연설을 했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위해 싸웁니다. 자유와 생명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는 유럽의 동등한 일원이 되기 위해서도 싸우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우리와 함께한다는 걸 증명해 주십시오. 당신들이 우리를 버려두지 않을 것이라는 걸 증명해 주십시오. 당신들이 실로 유럽인들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십시오. 그러면 삶이 죽음을 이기고, 빛이 어둠을 이길 것입니다.”
젤렌스키가 수도를 사수하기로 한 결정은 큰 영향을 끼쳤다. 개전 직후 사흘 이내에 함락될 것이라 여겨졌던 키이우는 최고 통수권자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열흘이 지나도록 함락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우크라이나는 세계 각국의 지원을 받아 악조건 속에서 전쟁을 버텨내고 있다. 그의 용기와 외교술이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끌어냈다.
3월 3일, 개전 이후 가진 첫 기자회견에서 그는 죽는 게 두렵지 않으냐는 질문을 받자 “죽는 것을 겁내지 않는 사람은, 또 자식들이 죽는 것을 겁내지 않는 사람은 정상이 아니다. 그렇지만 대통령으로서 나는 죽음을 겁낼 권리가 없다”고 답했다.
우크라이나 역사 흐름을 바꾼 유대인
한 유대인이 우크라이나의 운명을 바꾸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이야기이다.
지난해 크리스마스에 뉴욕타임스(NYT)는 코미디언 출신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옛 동료들을 중용하여 측근 정치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코미디언으로 채워진 우크라이나 정부가 많은 실책을 범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우크라이나 정치는 마치 코미디 호러 드라마 같다며, 전문가가 없는 정부, 외교관 없는 외교부, 장군 없는 군 지휘부가 언제 붕괴할지 모른다고 전했다. 한마디로 아마추어 정치가가 국가 대사를 망치고 있다는 요지였다.
하지만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그가 한 결연한 행동을 본 외국 언론들은 태도가 일변했다.
특히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이 3월 2일 ‘어떻게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를 수호하고 세계를 통합시켰나’라는 제목의 특집 기사에서 그에 대한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타임은 “러시아의 암살 위협에도 수도에 남아 국민의 항전 의지를 북돋웠다. 찰리 채플린이 처칠로 변모했다. 어떤 의미에서 샤를 드골보다 용감하다. 전쟁 지도자로서 처칠과 동급이다”라고 극찬했다. 또 “일주일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계의 민주주의 국가들을 움직이는 데 성공했다”고 덧붙였다.
한편 러시아의 침공 후 미국은 암살 위협을 받는 젤렌스키 대통령을 보호하고자 망명을 제안했다. 그러나 젤렌스키는 “여기가 (내) 싸움터다. 나는 (도피용) 탈것이 아니라 탄약이 필요하다”며 거절했다. 타임은 러시아군이 키이우 코앞까지 쳐들어왔음에도 도피하지 않고 수도를 지킨 그의 자세가 “역사의 흐름을 바꾼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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