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 만에 만난 친구들

 

최 숙희

 

고교를 졸업한 지 36년 만에 미주 동기 모임을 가졌다. 미시간에 사는 친구가 카카오 톡으로 연말 인사를 한 것이 시작이었다. 각자 연락되는 친구를 카톡방에 초대했다. 뉴욕, 뉴저지, 미시간, 버지니아, 오하이오, 일리노이, 애리조나, 조지아, 캘리포니아와 토론토까지 흩어져 살고 있었다. 온라인에서 소식을 전하다가 한번 모이자로 의견을 모으고 친구들이 가장 많이 사는 캘리포니아에서 첫 번째 모임을 갖기로 했다. 5~6시간씩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겨우 2~3일 놀자고 올까 싶었지만 친구들은 항공권을 끊고 호텔을 잡았다. 식당을 예약하고 작은 버스도 대절하며 계획을 짰다. 비둘기호 완행열차를 타고 경주 수학여행을 손꼽아 기다리던 사춘기로 돌아간 듯 설레는 시간이었다.

 

예약한 식당에는 여의도 미주 동창회배너를 걸고 흥겨운 음악을 곁들인 동영상이 돌아가고 있었다. 빛바랜 흑백사진 속 천진한 얼굴들이 정겹다. 소풍가서 포크댄스 하는 사진(여의도는 당시에 드문 남녀공학이었음), 합창대회, 생활관 입소 등 잊었던 일들이 새록새록 생각나는 사진들이다. 체육대회 피날레로 남학생들이 여장하고 퍼레이드 하는 모습에선 모두 웃음이 빵 터졌다. 처음에는 서먹했으나 추억을 공유한 친구들이라 금세 가까워졌다. 어느 누구 하나 까탈 부리거나 나대지 않아 좋았다. 딱 그 시절로 돌아가 즐겁고 편안한 마음이었다.

 

밤늦은 시간까지 웃고 떠들다 헤어진 후 다음날 버스투어를 했다. 섬마을 여의도 출신이라고 가이드분이 롱비치에 있는 네이플즈섬(Naples Island)으로 데려가셨다. 3개의 작은 섬을 다리로 연결하고 그 사이에 배가 다닐 수 있는 운하가 있다. 이태리의 베니스처럼 곤돌라가 실제로 운행 중이다. 운하를 끼고 양 옆으론 동화 속에서 봄직한 예쁜 주택들이 있다. 아기자기 꾸며놓은 앞마당에 나와 커피를 마시며 독서하는 주민도 보인다. 이곳은 정신없이 바삐 돌아가는 세상과는 상관없이 시간이 평화롭고 느리게 지나가는 듯하다.

 

다음 목적지는 팔로스버디스의 유리교회, 나는 집 근처라 가끔 산책하는 곳이니 새로울 것도 없지만 같은 곳이라도 누구와 오느냐에 따라 다른 느낌을 준다는 말이 맞나보다. 봄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나무를 바라보며 산들바람에 실려 오는 태평양의 바다 냄새와 새소리를 어릴 적 동무들과 함께하니 행복하다. 마침 결혼식이 있어 교회 건물 안으로 못 들어가서 아쉽지만 어여쁜 청춘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루는 모습이 흐뭇하다. 게티미술관에 가서도 예술품 감상은 뒷전이고 파라솔 아래서 커피를 마시며 수다 삼매경이다. 밀린 안부와 살아온 얘기가 길어져 투어로 예정된 장소를 절반도 못 갔다. 까마득한 여의도 시절을 추억하며 웃고 떠들다보니 이것이 바로 행복이고 힐링이 아닐까 싶다.

 

인생은 때로 예기치 않은 일로 행복해진다. 꿈같은 이틀이 훌쩍 지났다. 방전된 배터리가 충전된듯하다. 멀리서 어려운 길 날아온 친구들 고맙다. 내년에 또 볼 것을 약속했다. 여의도 윤중로 벚꽃이 연상되는 버지니아는 어떨까.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 2018/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