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같이 걸을 까요

 

 

어젯밤 모처럼의 단비로 초록 봄기운이 더욱 짙어졌다. 공기가 촉촉한 이런 날은 산책하는 즐거움이 배가 된다. 집 근처에 여러 산책로가 있지만, 몇 년 전 한 친구가 이곳을 안내한 이후로는 여기만 찾게 되었다. 길 전체가 키 큰 유칼립투스나무로 가려져 있기 때문에 누가 일부러 데려가기 전에는 절대로 알 수가 없다. 인적이 거의 없어 고즈넉함을 즐길 수 있어 좋다. 완만한 언덕을 오르내리다 보면 어느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등짝엔 기분 좋을 정도의 땀이 배기 시작한다. 싱그러운 풀 냄새와 새들의 지저귐이 반갑다. 누가 심었는지 모를 복숭아나무가 화사한 꽃 몽우리를 터뜨렸다. 이름 모를 야생화의 섬세한 자태는 덤이다. 바닥에는 나무톱밥 같은 것이 뿌려져있어서 오래 걸어도 발이 아프지 않다. 운이 좋으면 태평양이 보이는 보석 같은 산책로다. 근처로 이사 오고 싶은 마음에 부동산에 알아도 보았지만, 나오는 집도 없고 가격도 만만치 않다고.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이런 곳이 있는 것만으로도 축복으로 여겨야 하나보다.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고 했던가. 의지가 약한 나는 누가 같이 걸어야 오래 걸을 수 있기 때문에 거의 파트너를 동반한다. 오늘 나의 걷기 친구는 두 명이다. 명순 언니는 내가 대학을 갓 졸업하고 직장을 다닐 때 옆 사무실에서 일했던 사이로 그 당시는 얼굴만 아는 정도였다. 결혼해서 같은 서초동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모르고 있다가 첫아이 유치원 추첨 장소에서 우연히 만나고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그 후 드넓은 미국 땅에 와서 같은 동네에 살게 되었으니 기적같이 질긴 인연이다. 언니가 없는 내게 친언니 마냥 항상 의논 상대가 되어 주는 소중한 존재이다. 갱년기에 접어든 후 변한 남편에 대한 서운함과 불만, 성인이 되어 집을 떠나 저희들만 아는 아이들 이야기, 이민생활의 외로움이 단골 소재이다. 두 번째 파트너는 안젤라씨, 그녀는 고등학교 선배의 와이프이다. 아직 많이 만나지는 못했지만 ‘안젤라’라는 그녀의 세례명처럼 천사 같은 품성을 가진 것을 벌써 알고 있었다. 십여 년 전 선배의 하나밖에 없는 형이 심장마비로 죽고 남겨진 두 어린 아들을 입양하여 자신의 두 아이와 함께 차별 없는 사랑으로 키우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오신 시어머니 수발도 깍듯이 하는, 요즘 보기 드문 처자이다. 아이들이 아직 어린 탓도 있지만 오롯이 그녀만을 위한 시간이 너무 없는 것이 안타까워 일주일에 한번 걷기를 제안 하였다. 네 명 아이들의 뒷바라지와 연로한 시어머니 시중드는 일로 바빠 일주일에 한 번은 너무 자주이고 이 주일에 한 번은 노력해 보겠다고 수줍게 얘기하는데, 역시 나는 꿈도 못 꿀 천사다. 내 아들이 나이를 먹어가니, 저런 심성의 며느리를 볼 수 있었으면 싶다가, 나의 이기심이지 하고 마음을 접는다.

 

근 두 시간의 산책이 끝나면 점심을 먹는다. 오늘은 세 명의 그리스 조각같이 잘 생긴 젊은 총각들이 하는 Lox of Bagels로 가서 샌드위치를 먹기로 했다. 아무 특별한 장식 없는 단조로운 가게지만, 역시 식당은 맛으로 승부하는지 사람들이 길게 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당일 아침에 갓 구운 할라페뇨 베이글에 양상추, 보라색 양파, 잘 익은 토마토, 터키햄이 들어가는 단순한 샌드위치인데, 고소하면서 크리스피한 것이 맛있다. 곁들여 나오는 오이피클의 아삭함도 좋다. 커피는 커피전문점처럼 오만가지 메뉴로 골치 아프게 하지 않고, 콜롬비아, 코나, 헤이즐넛 세 가지라 주문하기도 편하고 맛도 순해서 내게 딱 이다. 프렌차이즈라서 같은 이름의 식당은 많지만, 세 명의 훈남들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퍼시픽하이웨이의 이집이 제일이다.

 

걷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음을 누구나 알 것이다. 시간과 운동화, 걷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금요일 아침 9시에 만나니 연락들 하시라. 맛있는 샌드위치와 커피는 제가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