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망증

집을 나온 후 차고 문을 닫았나 긴가민가 하며 다시 돌아가는 일이  종종 있다. 대개의 경우 차고 문은 잘 닫혀 있으나 집에 다시 가서 확인할 때 까지는 불안하다. 가스불은 껐나, 뒷 마당으로 나가는 문은 잠갔나 집을 나선 후 걱정된다. 쇼핑몰에서 차를 세워 둔 장소를 금세 기억하지 못하는 빈도수가 늘어간다.   

기숙사에 내내 있다가 아파트를 얻어 나간 딸을 보러 아들과 함께 로드아일랜드의 프로비던스를 방문하였다. 막내를 대학에 보낸 홀가분함으로 겨울방학을 맞은 아이들과 동부의 고즈넉한 도시들을 돌아보고 싶었다.  뭐 하나 제대로 없는 어설픈 아파트 살림과  을씨년스럽게 비까지 추적이는 날씨는 필요한  모든 것이  지척에 있고 따스한 햇살 가득한 써니 캘리포니아에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깨닫게 해준다.  엄마 페이스북에  저희들 사진 올리지 말라며 사진 안 찍으려 하는 아이들 달래가며 사진을 찍으며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LA집으로 오는 날 나의  건망증 때문에 사달이 났다. 비행기 시간이 틀려 딸아이는 먼저  떠나고 아들과 나는 집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커피 한 잔을 내려 마시며 막간을 이용해서 청소를 했는데 때마침 일찍 도착한 택시를 타느라 허둥대었나 보다. 빗길 트래픽을 불평하는  운전사의 뒤통수를 보다가  어느새 빨갛게 물드는 노을에 '동부는 해도  참 빨리 지네' 생각하고 있었다. 갑자기 커피메이커를 껐던가에 생각이 미쳤다. 딸이 여러 차례 강조한  ‘집을 마지막으로 나가는 사람의 체크리스트’ 첫 번째 항목이  ‘모든 플러그를 뺄 것’이었다.  커피포트의 반짝이는  초록불이 머릿속에서 아른거린다. 2주가 지나야 딸아이가 돌아올 텐데 아파트 관리인에게 부탁해서 가 보랄 수 있을까.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꺼지는 기능이 있는 커피메이커면  좋을 텐데, 과열로 불이라도 나면 어쩌나하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공항에 도착해서야 마침내  택시를 돌려 딸집으로 갔다. 커피메이커는 얌전히 꺼져 있었다. ‘엄마 도대체 왜 그래?’ 하는 아들아이에겐 “너도 엄마 나이 돼봐“하고 말았지만  이 정도면 중증이 아닌가.  한때는 별걸 다 기억하는 여자로 불리기도 했던 내가 말이다.

30대여성의 알츠하이머를 다룬 한국 드라마를 보고 치매와 건망증의 차이를 조사해 보니 내 경우는  다행히 건망증이다. 치매는 뇌 세포의 손상으로 생긴 분명한 질병이고, 건망증은 나이가 많아짐으로 나타나는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하나의 현상이라고 한다.  지속적인 스트레스와 긴장은 뇌세포의 피로를 촉진시켜 기억장애인 건망증을 초래한다고 한다. 

올빼미형인 나는 아침잠이 많아 남보다  짧은 아침 시간에 분주할 수밖에 없다. 세탁기, 식기세척기, 청소기는 동시에 돌린다. 급히 나가느라  가스, 차고 문, 뒷문의 체크는 잊기 일수 이다. 저녁에 집에 오면 습관적으로 텔레비전을 켠다.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어  나간 후  혼자 집안에 있는 느낌이 싫어 생긴 버릇이다. 설거지 물소리나 식사 준비로 정신을 집중하지 못해  내용은  거의 못 알아듣지만, 가끔 흥미 있는 소재가 보이면 TV소리를 키우며 몰두하기도 한다. 인터넷 블로그와 카페에 들리기 위해  컴퓨터도  켠다. 가스불을 켜고 음식을 하면서 전화도 받는다. 멀티태스킹의 종결자가 바로여기 있다.

소심한 A형이라 스트레스를 잘 받기도 하지만 멀티태스킹으로 뇌에 과부하가 걸려 건망증이 심해진 것이다.  동시다발로 여러 가지 일을 하느라 주의력 결핍이 초래되어  오히려 비능률의 결과가 생겼다.  경주마가 눈가리개를 하고 기수의 방향지시에 온 신경을 집중한 채로 달릴 때처럼은 아니라도  집중하는 습관을 키워야겠다.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다는 자만심을 버려야한다. 메모하는 습관과 하루 30분정도 명상이 건망증을 치유한다고 하니 명심할 일이다. ‘아~~내 머릿속의 지우개’ 할 때가 많아진다.  나이가 들면서 심해지는 어쩔 수 없는 증상이라면  슬기롭게 껴안고 가야할 동반자로 받아들여야만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