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머리카락

 

 

 

아침 여덟 시 오십 분.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의 학교 주차장에 차를 대었다. 쟈켓을 들쳐 입고 가방을 한쪽 팔에 거는 아들이 내리기를 기다리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멀리 운동장 복판에 가방을 메고 우르르 달려가는 꼬마들의 까만 머리, 노랑머리 사이로 반듯하게 빗어 넘긴 은빛의 머리카락이 끼어서 함께 걸어간다.

고동색 조끼에 베이지색 바지를 깔끔하게 차려 입은 할아버지. 아이들 걸음에 맞추느라 바쁘다. 토끼가 얌전히 앉아있는 케이지를 양손으로 움켜잡고 나폴거리는 손녀의 치맛자락을 놓칠세라 마음이 급한 모습. 마음만큼 따라와 주지 않는 다리로 허리를 굽히고 걷는 할아버지를 가만히 바라보니 아! 아버지, 우리 아버지다. 막내딸의 출근 시간이 조금이라도 수월하라고 손수 두 손자 손녀를 태우고 안경 속의 눈을 부비면서 아침마다 운전대를 잡는 우리 아버지. 오늘은 손녀 학급에서 토끼에 관한 공부를 하기로 했나보다. 소란스런 학교 주차장 귀퉁이, 겨우 발견한 좁은 공간에 어렵게 차를 대고는 “자, 무겁다. 할아버지가 니네 교실까지 들어다 줄테니까 교실이 어디니? 앞 서거라.” 하면서 내린 모양이다. 아이들 틈에 끼여 건물 안으로 사라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나는‘아버지” 하고 가만히 소리 내어 불렀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참으로 멋쟁이셨다. 옛날 60년대, 그 시절에도 아버지는 핑크빛 와이셔츠를 멋지게 차려 입으셨다. 먼 데 출장이라도 다녀오는 날에는 알록달록한 비닐에 ‘대구 능금’이라고 쓰인 사과 바구니랑 천안 호두과자를 사 와서 우리 6남매에게 늦은 밤의 횡재를 안겨주셨다. 약주를 즐기지는 않았지만, 간혹 취하신 날에는 손에 식빵을 들고 오셨다. 잠든 우리들을 모두 깨우며 생전 부르지 않던 콧노래까지 곁들여 방안 가득 당신의 기분 좋은 저녁을 풀어 놓으셨다.

“얘들아, 아버지 오셨다. 빵 좀 먹어봐라.”

씻지도 않은 손으로 볼록볼록 튀어나온 식빵을 한 덩이씩 뚝뚝 잘라서 나눠주면, 우리는 눈이 부신 전깃불을 한쪽 손으로 가리며 방금 자다 일어난 마른입으로 꾸역꾸역 잘도 먹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가 취해서 들어오는 날이 좋았다.

어느 일요일 오후, 방바닥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우리를 부르던 아버지가 생각난다. 우리는 방바닥에 주욱 누워서 아버지께 발을 맡기고 아버지는 또각또각 발톱을 깎아주셨다. 가끔 아버지는 산수 문제를 내어주기도 했다. 덧셈 뺄셈 각각 열 문제씩. 모두 다 맞으면 빨간 색연필로 커다랗게 100점이라고 써 주셨다. 나는 아버지만 계시면 산수 문제 내달라고 졸랐다. 그게 하기 싫은 공부인줄도 모르고. 학교에서 100점을 받아오는 날에는 상으로 돈을 주셨다. 액수는 생각나지 않지만, 나는 그 돈으로 만화방으로 달려갔다. 어느 날엔가 마당을 뛰어나가는 내 뒤통수에다 물었다. “희야, 또 만화방 가나? 만화가 어디가 그리 재밌노?” 나는 뒤를 휙 돌아보며 받아넘겼다. “아버지는 담배가 뭐가 그리 맛있어요? 어른들 담배 피우는 맛하고 똑 같습니다.” 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나의 당돌한 대답을 대견해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낯이 화끈거리는 되바라진 응답이었다.

 

고만 고만한 6남매가 한 집에 있으니 우리는 수시로 쿵쾅거리며 싸웠다. 힘 있는 형은 씩씩거리고 동생은 울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둘을 다 불러 앉혀놓고 발바닥을 때렸다. 우리를 체벌하실 때는 손바닥이나 발바닥을 때렸다.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는 아버지를 뵌 기억이 없다.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몹시 화가 날 때는 머리고 등이고 엉덩이고 할 것 없이 마구마구 때려주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의 아버지를 생각한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무섭게 화를 내지 않으셨는데. 조목조목 잘못을 스스로 시인하게 하고 몇 대의 매를 맞고 싶으냐고 묻곤 하셨는데... .’ 어느새 마음을 다스리는 자신을 보곤 한다.

 

반듯하고 멋장이던 아버지도 어느 듯 머리가 희어졌다. 우리들도 이젠 모두 어른이 되어 각각 자기 모양대로 가정을 꾸려가면서 또 다른 소리로 아버지를 찾는다.

“아버지, 오늘은 아이들 축구 시합이라서 공원으로 데리고 가야 합니다.”

“아버지, 오늘부터 바이올린 레슨 시작해야 합니다.”

“아버지, 오늘은 농구를 YMCA에서 한답니다”

수시로 보채대는 부탁을 아버지는 기억하기에 바쁘다. 그래서 아버지의

차는 온갖 약도와 아이들의 시간표로 어지럽다.

“아버지, 스케쥴이 자꾸 바뀌어서 정신이 없죠? 제가 아버지 머리 많이 쓰셔서 치매 걸리지 말라고 자꾸 자꾸 바꾸고 있습니다. 히히히”

“그래그래, 자꾸 바꾸어라. 나도 낯선 곳 찾아 가보니까 구경이 좋다.”

딸의 애교를 미안해서 하는 말인 줄 다 알아들으시고 허허허 웃는 우리 아버지. 어느새 연세가 일흔 여섯이 되셨다. 듬성듬성한 머리에 주름진 아버지의 목을 볼 때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아버지를 부르기만 했지 무엇 하나 해 드린 게 없는 것 같아 죄송하다. 건강하시니까 여든 살은 수월히 넘기시겠지. 회갑 잔치는 가족들 모두 모여 저녁 한 끼 먹는 걸로 넘겼고, 칠순은 여행 다녀오시라고 돈만 드리고 말았는데. 나는 그게 마음에 걸려 남의 부모 회갑이나 칠순 잔치만 보면 속이 상한다. 회갑도 칠순 못 차려 드린 우리 아버지, 팔순 잔치는 아주 풍성하게 차려드려야지 하는 게 요즘 나의 바램이다. 평생 자식들을 가슴에 안고 무거웠을 아버지. 그 날에는 모든 삶의 짐을 다 풀어놓고 활짝 웃으시라고 해야지.

 

나는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아버지의 뒷모습에다 대고 말한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하는 인사는 팔순 잔치에서 우리 모두 예쁜 옷 차려 입고 할게요.’

 

(아버지는 79세에 돌아가셔서 결국 팔순을 못 해 드렸다.)

 

<사람이 고향이다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