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Out

 

 

겨울비가 무겁게 내리는 아침. 감기기운으로 맥없이 늘어진 몸을 끌고 찜질방에 갔다. 뜨거운 황토방에 몸을 눕히고 비몽사몽 시간을 많이 흘렸던가 보다. 얼핏 너무 오래 있었나 하는 생각이 스치며 누가 내 등을 탁.탁. 두드리는 것 같다. 이유도 없이 다급한 마음이 되어 벌떡 일어났다. 순간 머릿속이 핑 돌며 어지러운 게 대변이 마렵고 구토증도 난다. 왼쪽 가슴이 마치 뼈를 장작 쪼개 듯 뜯어내는 아픔이다.

멜로 연속극의 한 장면인 듯, 가슴을 움켜쥔 채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갔다. 변기통에 얼굴을 박고 웩웩거렸다. 설사도 마구 쏟아져 나올 것 같다. 힘이 없어 그대로 쓰려지고 싶다. 온 몸이 바닥에 풀어지면 소리 없이 땅 속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두려운 예감과 공포가 나를 휘감는다. 어쩌면 내 영혼이 육체를 이 칙칙한 바닥에 내팽개쳐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희미한 의식 속에서 울렁 뇌리를 흔들고 지나간다.

숨쉬기가 조금 수월해졌다. 거울 속 얼굴은 온 몸의 피가 모두 빠져 나간 듯 마치 아그리파 석고상 같다. 밖으로 나와 눈에 들어오는 빈자리에 그대로 엎어졌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읽은 글이 생각난다. 심장에 이상이 오는 느낌이 들면 헛기침을 컥컥 하라고 했지. 억지로 기침을 만들어 뱉으며 새 공기를 가슴팍으로 부지런히 밀어 넣었다. 통증이 조금씩 잦아든다. 

팔에 턱을 묻은 채 눈을 들어본다. 아무도 나의 이 위급상황을 눈치 챈 사람은 없다. 머리가 희끗한 아저씨는 안마의자에 앉아 만화책을 읽고 있고, 아줌마들은 드러누운 채 연속극에 빠져있다. 마주보고 엎드려 소곤거리는 연인도 있고 수건을 얼굴에 뒤집어쓰고 잠을 자는 아가씨도 있다. 나는 투명인간인가?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한다. 이 고통은 온전히 나만의 것. 그들의 평화는 내게 오지 못하고 나의 전쟁도 그들에게 가지 못한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나누고 있지만 서로를 단절시키고 있는 보이지 않는 벽이 참으로 두껍고 한편 두렵다.

 

저녁에 남편에게 말했다. 심장쇼크였단다. 조금만 더 심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돌아보면 절박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어느 쪽도 나의 선택으로 결정될 수 없었다는 것이 기가 막힌다. 내 생명은 온전한 내 것이면서도 내 의지나 희망과는 전혀 상관없이, 나의 명령이나 호소 따위에는 더더구나 아랑곳없이. 광폭한 바람처럼 내 육체를 휙 내던지고 떠날 수도 있었다.

 

얼마 전,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노트북에 글을 쓰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집으려고 엉거주춤 일어나다가 그만 스위치를 꺼버렸다. 노트북의 열려있던 창에는 수필 한 꼭지가 완성 중이었고 또 다른 창에서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어린 왕자와 어린 공주’가 흐르고 있었다. 아차, 하는 순간에 화면이 깜깜해졌다. 기능을 멈춰버린 컴퓨터는 찬 금속 덩어리일 뿐. 화면이 열개가 열려 있었던 한 개가 열려 있었던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의 영혼도 이럴 것인가. 어느 찰나에 스위치가 꺼져 버리면. 육체는 전원이 차단된 컴퓨터랑 무엇이 다른 걸까. 

죽음은 나와 상관없는 존재인 듯 살아왔다. 나이만 먹었을 뿐, 아직도 인생의 출발점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내 삶을 더 채우고 설계할 부분이 지금도 무한정 남아있는 줄 알았다. 자비를 베풀 볼 시간도, 뜨겁게 사랑할 시간도 얼마든지 있는 줄 알았다. 살아낼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있기에 다음에. 다음에. 그 ‘다음에’란 말에 온갖 핑계를 다 걸어놓고 살았다.  문득 마음이 급해진다. 어느 날 사방이 어두워지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쌓은 기억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정전의 순간이 올 수도 있다는, 서늘한 자각이 나를 깨운다. <사람이 고향이다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