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 보안

   

 

  남편의 이메일 주소로 교회의 어떤 여자분이 편지를 보냈다. 풍선처럼 부풀어 금방 터질 것 같은 벌건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존경하는 류장로님 내외분께’로 시작된 편지 내용은 P장로님이 교회에서 다짜고짜로 손을 잡는다는 것이었다. 며칠 전에도 계단을 올라오는 자기 손을 잡고 두 계단이나 오르도록 놓아주지 않아서 창피를 무릅쓰고 고함을 질렀다는, 말하자면 성희롱을 당해 정신적 육체적 충격이 크니 조처를 취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다 읽기도 전에 P장로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교인들을 만나기만 하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먼저 다가가 다정하게 손을 내미는 60대 중반의 장로님이시다. 새벽기도를 하고 나올 때에 청하는 악수는 민망하다는 여자집사님들의 말을 들은 적이 있긴 하다. 그렇지만 그건 그 분의 사랑법이라는 걸 알기에 아무도 트집 잡는 사람은 없다.

“이 분이 많이 외로우신가 보다. 당신이 한번 만나서 다독거려 드려요.” 남편은 또 말했다. “그 장로님을 내가 아는데. ”

 

  조용히 P장로님과 목사님 하고만 의논하려던 이메일이 전교인들에게 뿌려졌다는 걸 며칠 뒤에 알았다. P장로님은 본인의 인사법이 성희롱이라 느껴졌다면 큰 실수를 한 것이라며 해명과 사과를 했다는 말도 들었다. 교회는 조용했다. 시무장로가 혼자 살고 있는 여신도를 성희롱 했다는 엄청난 추문을 가지고도 수군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말했다. “그 장로님이? 에이, 아니야.”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하는 옛말이 있지만, 요즘은 아니 땐 굴뚝에서도 연기가 난다. 특히 본인이 없는 자리에서 악의를 가지고 하는 말은 더욱더 부풀고 뒤틀린다. 심지어 각색까지 된다. 듣는 사람은 사실유무에 대한 판단은커녕 말하는 사람의 감정에 이입되어 아무런 여과 없이 듣게 된다. 비난 받고 있는 상대를 내가 잘 모르는 경우는 더더구나 그러하다.

얼마 전 모임에서 단체 여행을 가게 되었다. 평소 이름만 듣던 사람들도 합류한 여행이었다. 1박 2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오고가는 버스 안에서, 식당 등에서 함께 어울리며 서로를 알게 되는 좋은 기회였다. 누가 그랬다. “이번에 놀랐어요. 소문만 듣고 정말 나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에 피해 다니기만 했는데 알고 보니 참 좋은 사람이네요” 주위 사람의 입을 통해서만 전해 들었던 분이 직접 만나 보니 전혀 다르다는 것이었다. 이 사람도 그렇고 저 사람도 그렇고. 잘못 생각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닌 것을 보며 자기가 얼마나 때 묻은 유리창을 통해서만 사람을 보고 있었는지 어리석었다고 했다.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국경인 우스파야타 고개에는 ‘안데스의 예수님 상’ 이라는 청동상이 하나 서 있다. 왼손에 십자가를 들고 오른손으로는 축복하는 모습의 이 동상은, 1904년 양국의 국경 분쟁이 평화롭게 타결된 것을 기념하여 제작된 것인데 지금까지 평화의 상징으로 사랑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착공 당시에는 두 국민들 사이에서 한바탕 큰 소동이 일어났다.

동상을 세우는 과정에서 지형과 바람의 방향, 조건들을 감안하다보니 몸이 아르헨티나 쪽을 바라보며 서게 되었다. “예수님이 왜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거야. 아르헨티나 쪽만 축복을 주는 형상이잖아.”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불만이 국민들 사이에서 꼬리를 물고 퍼져 온 나라가 원성으로 들끓었다. 양국 간의 화해 무드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때 한 기자의 재치 있는 문장이 험악한 두 나라의 분위기를 일시에 바꾸어버렸다. ‘예수님이 아르헨티나 쪽을 향하고 있는 것은 그 나라가 아직 더 많은 보살핌이 필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기사를 읽은 칠레 사람들의 감정은 가라앉고 두 나라는 다시 평화로워졌다고 한다.

 

  말은 창조적 에너지를 내는 근원이다. 생각이 언어를 통해 밖으로 나옴과 동시에 사람을 치기도 하고 어루만지기도 한다. 책임질 수도 없는 말을 사실 판단 없이, 윤색과 왜곡으로 기정사실화 하여 돌멩이처럼 이리저리로 마구 던지는 건 테러나 마찬가지다. 아니, 테러의 수준을 넘는 수도 있다. 생각 없이 내뱉은 작은 말로도 사람의 마음을 천당과 지옥을 헤매게 만드는데, 악의를 가지고 한 증오의 말은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키는지 모른다. 더구나 무서운 건 언어테러는 장소와 시간에도 구애받지 않고 마구 활동한다는 것이다. 혀가 주는 횡포가 얼마나 무섭기에 하나님은 이빨이라는 벽돌로 막으시고 입술로 또 덮어서 이중 보안을 했을까 하며 웃은 적이 있다.

 

  죠이스 마이어(Joyce Meyer)의 <말을 바꾸면 삶이 바뀐다.>를 읽었다. SNS의 등장, 스마트폰의 개발, 대중언론매체의 발달로 말이 너무나 쉽고 빠르게 퍼져나가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말하기 습관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한 책이다. 부정적이거나 분노의 말, 험담 같은 건 ‘말 하지 않는 연습’을 하고, 신뢰와 격려, 축복의 말은 ‘말하는 연습’을 날마다 하여 내 영혼 속에서 익히라고 한다. 그런 말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 조직을 건강하게 만든다. 매일 하는 ‘한 마디’를 바꾸면 축복의 대로가 열린다고 한다.

 

  거대한 배가 작은 키 하나로 움직이듯이 작은 혀가 나의 영혼과 삶을 끌고 다닐 수도 있다. 우리는 날마다 내가 한 말을 내가 제일 먼저 듣고 또 먹으면서 살고 있다. 같은 상황을 놓고 모함과 음해로 말을 퍼뜨리는 사람과 부드러운 시선으로 감싸 안는 사람의 차이가, 전쟁과 평화라는 거대한 단어까지 바꾸어 놓지 않았는가.

P장로님의 반가운 인사가 성희롱으로 둔갑하는 데는 그리 큰 도구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 여자의 작은 말 한마디였다. 그러나 다행히 양쪽에 날을 세운 위험한 칼날은 그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칠레 기자의 마음처럼 온유하고 평화로웠으므로. <사람이 고향이다.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