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 Great Idea!”
딸네 집 컴퓨터는 언제나 오픈이다. 사위의 이메일도, 딸의 이메일도 늘 켜 둔 채로 있다. 처음 그것을 보았을 때는 마치 남의 비밀을 본 양 놀라서 얼른 닫았다. 삶이 온전히 공유되고 서로를 투명하게 들여다보는 부부관계가 참으로 신선하다는 느낌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호기심이 생겼다. 더구나 컴퓨터를 둔 장소가 부엌 바로 옆의 툭 터인 사무실이라 딸네 집에 갈 때마다 이메일을 훔쳐보는 지경이 되었다. 그들의 삶은 이제 내게도 투명해졌다.
사위와 딸, 딸의 시누이와 사돈내외가 공동으로 주고받는 메일에는 다음 가족 휴가는 어디로 갈 것인지, 각 가정이 어디로 여행을 다녀왔는지 등 잡다한 생활사와 시누이네와 딸네 아이들 재롱떠는 사진 등이다. 사위의 이메일로는 월급이 얼마나 올랐고 요즘 어떤 케이스의 사건으로 골치가 아픈지 등도 알 수 있다.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사돈내외가 손주 보러 엘에이로 오고 싶은데 언제가 좋겠냐는 물음을 사위에게 보내면 사위는 그것을 딸에게 보내어 어떻게 할까 묻는다. 세 가정의 일거수일투족이 일목요연하게 내 머리에 그려지는 재미로 나는 딸네 집에 갈 때마다 최근에 업데이트 된 이메일을 뒤지는 재미가 쏠쏠하다.
며칠 전에는 딸의 이메일을 보다가 부아가 났다. “부모님이 오시는 24일에 스타워즈 보러 갈래? 3D라고 하더라.” 사위가 딸에게 보낸 이메일이었다. 그렇잖아도 올해는 뉴욕의 시누이네랑 사돈내외가 딸네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지내기로 했다는 말을 들은 터라 둘째를 낳은 지 이제 겨우 한 달 밖에 안 된 딸의 몸 상태를 걱정하고 있는 중인데. 이게 무슨 철딱서니 없는 소리인가 싶었다. 갓난쟁이에다 세 살짜리 애를 데리고 무슨 영화? 하면서 화를 내어야 할 딸이, 한 술 더 떠서 'Oh, Great Idea.'하며 답을 보냈다. 자기 부모 환대할 마음에 아내 처지 생각 안하는 사위가 괘씸하고, 지각없는 딸 때문에 하루 종일 속이 부글거렸다.
자기네 이메일을 훔쳐보는 줄 모르는 딸에게 은근한 쇄뇌 공작을 시작했다. 여자에게 산후조리는 필수적이다. 적어도 100일 되기 전까지는 몸조심을 해야 한다. 젊어서는 모르지만 나이 들면 반드시 나타난다. 나를 보아라. 건강하니 너희들 귀찮게 하지 않아 얼마나 좋니. 만일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거나 아프다고 골골거리면 모른 척 할 수도 없고 힘들겠지? 네가 건강해야 아이들이 편하다. 그러므로 식구들이 모이면 너는 아기를 안고 앉아만 있고 모든 식사와 손님 뒷바라지는 데이빗이 하도록 만들어라. 외출하자고 하면 절대로 따라 나서지 마라. 추운데 아기 데리고 나가면 감기 들고 큰일 난다. 절대로... 절대로... 다행히 딸은 응, 응, 대답은 잘 했다. 그러나 믿을 수는 없었다.
드디어 오늘 크리스마스이브. 사돈내외가 시누이네 보다 하루 앞 서 오시는 날이다. 영화를 보러간다고 하던데 마음 약한 딸이 아기를 들쳐 안고 따라 나서는 것 아닌지. 나는 아침부터 걱정이 되어 무슨 일을 해도 집중이 안 되었다. 꾹꾹 참다가 오후 세 시쯤 문자를 보냈다. ‘엄마가 또 잔소리를 한다. 너는 민아만 안고 앉아 있어라. 너 몸은 아직 정상이 아니다. 절대 밖으로 나가지 말고 집에 있어라.’ 이메일 훔쳐 본 걸 눈치 챌까봐 영화를 보러가지 말라는 말은 못하고 밖에 나가지 말라는 말만 했다. 한나절이 지나고 해가 뉘엿뉘엿할 무렵에야 딸의 문자가 왔다. ‘오케이 엄마, 시부모님은 점심때에 오셨고, 데이빗이 스페셜 라쟈냐 만들어줘서 잘 먹었어. 설거지는 시부모님이 깨끗이 해 주시면서 나더러는 힘드니까 앉아만 있으래. 이제 나 데이빗이랑 스타워즈 영화 보러 갈 거야. 데이빗이 자기 부모님께 집에서 아이들 돌보고 계시라고 하네. 걱정 마. 엄마.’
아, 나의 착한 사위. 마음이 활짝 밝아져서 당장 답장을 썼다. 'Oh, Great Idea.'
종일 안절부절 쓸데없는 에너지를 쏟았다. 돌아보면 사위도 엄연한 남의 집 귀한 자식이고 사돈 내외도 나와 똑 같은 부모인데 며칠 동안 사랑이라는 착각으로 너무 딸에게만 집착했나 하는 자각이 든다. 내 딸은 어떤 상황에도 공주여야 한다는 이기적인 마음이 문제였다. 사위도 내 자식이라며 품으면 너무나 편안할 것을.
두 사람이 열심히 꾸려나가는 삶을 옆에서 기웃거렸던 내가 참 딱하다. 딸의 일거수일투족이 너무 투명하니 내 감정이 두 집 살림을 하느라 바쁘기도 했다. 며칠 동안 실제인지 상상으로 만든 것인지도 모르는 상황을 두고 희비(喜悲)에 휘둘리는 어리석은 감정낭비를 엔간히도 했다. 똑같은 사건을 두고 행, 불행이 내 마음밭 상태에 따라 왔다 갔다 한다는 말은 정말 진리다. 어떤 상황도 행복 쪽으로 해석하지 못할 토양이라면 엔간한 사건쯤은 눈감아 넘기는 무관심이 필요할 것 같다. 새해부터는 딸네 집 컴퓨터 보기를 돌(石) 보 듯 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럴 때는 곁에서 누가 'Oh, Great Idea.' 하고 말해 줘야 하는데. <사람이 고향이다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