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소가 웃는다 / 최장순

 

 

 

선한 웃음에 끌려 문을 열고 들어간다.

"설렁탕 하나!"

채 일 분도 못 되어 펄펄 끓는 뚝배기가 식탁에 놓였다. 시장기가 훈기를 맡는 동안 손은 국물부터 한술 뜬다. 종일 고갈된 나를 보충해 줄 반가운 기별이 싸르르, 속을 훑고 내려간다. 고기 얹은 한 술을 더 뜰 때 이랴, 농부의 채근을 따라 무논을 설렁설렁 걸어가는 소가 보인다.

다급한 목소리가 단잠을 꺠운 그 새벽, 산기産氣가 있다는 기별을 들은 할아버지는 부리나케 외양간에 등불을 걸었다. 가마솥에 물을 끓이고 장정들이 분주히 오가는 동안, 쪼그려 앉은 나는 신기한 광경을 놓치지 않으려고 졸린 눈을 비볐다.

산통을 하는 어미 발치로 툭, 떨어진 뭉치, 미끌미끌한 태막에 쌓인 그것을 보는 순간, 순산했다는 아도감과 생병을 받아낸 기쁨이 뒤섞였다. 환호성 속에 어미 소는 송아지를 핥고 있었다. 비칠비칠 다리를 세운 송아지를 보며 또 한 번 기쁨이 쏟아졌다. 새끼를 보듬는 어미의 눈빛은 따스했다. 어미젖으로 몸을 키우며 풀 뜯는 법과 여물 먹는 법을 익힌 어린 소, 무럭무럭 자란 송아지는 보물이었다. 선한 눈망울은 온 세상이 모두 제 것이라는 듯 호기심을 담고 있었다. 못된 송아지는 엉덩이에 뿔이 난다는데, 녀석은 엉덩이에 뿔보다 제 뿔이 먼저 날 것 같았다.

그즈음 할아버지는 우시장으로 어미 소와 송아지를 데리고 나들이를 간다고 했다. 장날의 해거름, 할아버지를 따라온 소는 어미뿐이었다. 제 새끼를 잃은 어미는 터벅터벅 어스름을 딛고 있었다. 어느 집 일소로 팔려갔다는 송아지, 아마도 코뚜레가 뚫린 채 새로운 주인과 호흡을 맞추고 있을 것이었다.

어차피 인간을 위한 가축의 운명, 굳이 그들의 생을 복잡하게 논할 필요는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커피 한 잔에 값싼 아프리카 노동의 슬픔이 찰랑거리듯, 내가 먹는 설렁탕 한 그릇엔 도축장으로 향하던 소의 눈물이 고여 있다.

센 불과 은근한 불로 끓여낸 설렁탕엔, 봄날의 쟁기질과 여름날의 되새김질과 가을걷이를 돕던 걸음과 여물 먹던 겨울날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그 일생을 받쳐준 뼈마디들과 살이 나를 받쳐준다. 내가 잔머리를 굴려 어떻게 하면 이득을 챙길까 궁리할 동안, 소는 온전히 어린 날과 어른이 된 날을 기억하며 제 머리를 내어준 것이다. 세치 혀가 남의 흉을 즐기고 하루의 달콤함에 깃들어 있을 때 한 시절을 핥던 제 혀를 내게 주고 있는 것이다. 나의 두 귀가 솔깃함에 팔랑거릴 때, 소귀에 경 읽기면 어떠냐고 온갖 소문을 닫은 두 귀를 내게 주었다. 그 귀는 여름날 귀찮게 달라붙던 쇠파리를 쫓느라 신경을 모았을 것이다. 여전히 훈기가 도는 탕 한 그릇, 컵라면처럼 조급증과 간편함에 길들여진 맛이 아닌 진국이다.

대문짝만한 간판의 '착한 한우'는 그저 가격이 적당한 우리 소가 아니다. 자신의 전부를 내어준 착한 소다. 밥을 말아 술술 내 입으로 퍼 넣을 때, 이른 봄의 쟁기질이 들녘을 꺠우듯 잠시 주저앉은 나의 시간이 활기를 되찾는다. 봄날의 하품을 걷어낸 논에는 저벅저벅 발자국이 찍히고, 걸음을 재촉하는 농부의 음성이 들린다. 여름날의 파리를 쫓던 꼬리의 힘은 느낄 수 없지만, 풀만 먹고도 살이 찐다는 유유자적이 내 입안에 들러붙는다. 볕을 등에 지고 돌아가는 고단함에도, 여물을 앞에 둔 외양간 속 온기도 한 겹 껴입는다.

건초와 마른 볏짚을 썰고, 콩깍지와 쌀겨나 콩을 섞어 푹 끓여낸 쇠죽은 겨울날 소의 특별식이다. 어른들은 이른 아침 쇠죽을 먼저 끓이고 무럭무럭 오르는 김을 만끽하는 소를 보고서야 아침상을 차렸다. 그때의 구수함이 내게로 왔는지 어느 정도 배를 채운 뒤 휘이 둘러보는 눈길도 구수해진다.

한 숟갈에 고작 5그램이나 담을 수 있을까. 그러나 피보다 진한 그것은 핏물을 우려내 푹 고아낸 뽀얀 국물, 쇠붙이를 담금질해서 연장을 만들듯, 설렁탕도 오랜 시간 불의 세기를 조절하며 뼈와 살을 고아내는 수고로 만들어진 것이다. 수많은 숟가락질에 어느덧 뚝배기는 바닥을 드러내고 주린 배는 든든히 채워진다. 가죽과 내장을 드러낸 소가 나를 위해 희생한 것, 쉴 새 없이 욕심을 떠먹으면서도 나를 반추하지 못하는 한 개의 밥통이 이토록 거대할 줄이야.

소의 일생을 한 그릇으로 비워낸 나는 누구에게 나를 비워줄 수 있을까. 우려내고 또 우려내도, 쥐어짜고 또 쥐어짜도 한 줌 생각이 고일까말까 하는 나는 누구의 주린 가슴을 덥혀줄까. 누구의 허기진 생각을 채워줄 수 있을까. 소는 제 가죽마저 든든한 신발로 벗어주고 갔는데, 한 움큼 지식을 보태줄 책가방을 내 손에 들려주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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