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별 찾아내기 / 유혜자  

 

 

 

안과에서 일 년에 한번씩 시야검사를 한다. 시야검사는 눈을 움직이지 않고 볼 수 있는 범위를 검사하는 것으로, 최근엔 검사과정이 컴퓨터 프로그램화된 자동시야검사기로 편리하게 검사할 수 있다. 기기 앞면에 이마와 턱을 바싹 붙인 후 작은 렌즈를 통해 들여다보면 은하계같이 뿌연 화면의 가장자리 쪽에서부터 반짝 별이 나타난다. 이 별이 돋는 순간 재빨리 손에 쥔 신호기의 스위치를 누른다. 눈의 초점을 모으고 바깥, 안쪽에서 나타나는 별 하나라도 놓칠 세라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래도 닦을 새 없이 스위치를 눌러야 한다. 별을 식별해냈어도 스위치를 안 누르면 검사표에 표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 전 시야검사를 하면서 여행이야말로 삶의 시야를 넓히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책상 위 전기스탠드에 불을 켜면 좁은 둘레만 환하다. 어느 날 천장의 전등 촉수를 높이고 환하고 넓은 공간을 누리고 싶게 된다. 자기만의 테두리 안에서 안주하는 것은 아닌가 돌아보고 일상적인 삶에서 벗어나 먼 곳, 넓은 세계를 찾아 떠날 꿈을 꾸는 것이다. 주어진 삶에서 벗어나려는 정신적인 사치가 아니라 안일하게 어떤 일을 기다릴 수 없는 조바심으로 여행을 기도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엔 그야말로 자기가 사는 땅이 세사의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고향에 흐르는 강물이 어디로 흘러가고 멀리 보랏빛 산맥은 어디로부터 시작되었는지 궁금했다. 그 무렵 내게 처음 여행이라는 기회가 왔다. 교과서에서 배운 백제 멸망의 역사, 그 현장이었던 부여에 가기 전에 나는 얼마나 설레었는지 모른다.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 왔을 때 삼천 궁녀가 치마를 둘러쓰고 뛰어 내렸다는 낙화암, 고란사와 조룡대 바위의 전설이 서려 있는 부소산에 간다는 설렘으로 잠을 설쳤다. 그러나 장마가 지난 뒤여서 푸르다는 백마강은 황토빛 누런 물이 넘실거렸고 부소산은 부서진 기왓장 더미가 소나무 밑에 쌓여 있을 뿐이었다. 고란사의 규모는 상상한 것보다 얼마나 작던지.

이처럼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언제나 설레었고 돌아올 땐 허전하기 일쑤여서 한 때는 여행하기를 망설였다. 그러나 후일 가슴 설렘도 나의 몫이지만 허전함도 내 것이라 소중해졌다. 기대와 설렘이 있었기에 허전함도 당연한 것, 이 반복적인 행위에 후회가 없게 되었다.

우리는 무언가 변화가 없으면 견디지 못한다. 새로운 것, 창조적인 삶을 바라기도 한다. 일상적 삶이 답답하면 더욱 그렇다. 일상적 삶이 돌아가지 않고 거대한 늪처럼 침체해 있을 때 여행은 새로운 공간을 찾아보려는 열망에서 비롯된다. 우리 삶의 형태는 별다름이 없으리라. 그리고 바라는 실상도 거창한 이념이나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소하지만 소중한 일상적 삶의 규범을 따름에 있다. 삶의 골격은 비슷비슷하나 피부, 즉 삶의 질을 이루는 데는 개인차가 있을 것이다. 삶의 질을 가꿈에 있어서 반드시 경제적인 것에 좌우되지는 않는다. 짐작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서 나그네가 되어 얻어지는 소중한 추억이나 은밀한 기쁨은 윤기 나는 살결을 유지하게 할 것이다.

내가 가보고 싶은 것은 먼 미지의 땅, 남극이거나 북극 또 아니면 지도상에 없는 아름다운 곳이 아니다. 목적지가 어이이든지 가슴속에 간직해두고 싶은 또 하나의 동경이 자리 잡고 있어서 넘치는 기대나 상상으로 우선 행복해질 수 있다. 어쩌면 이 세상은 어느 곳에나 보이지 않는 비밀과 신비가 가득 차 있는 경이로운 것이다. 풀 포기만 더부룩한 어느 문명의 유적지나 잘 보존된 문화유산이 빛나는 나라, 모래와 낙타초만이 띄엄띄엄 있는 사막의 어느 모서리에도 시원한 수로가 있고 허물어져 가는 빈 집 어딘가에 국보급 보물이 감춰져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야간비행』​의 생떽쥐뻬리처럼 지상에서 먼 곳을 비행하며 따뜻한 불빛을 그리워하는 처지처럼 외로운 나그네이기도 하다. 여행지에서 색다르고 기쁜 소득이 없었다해도 내가 두고 온 것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고 내 자신을 멀리서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내가 보고 들었던 사물들과 만나는 사람들, 그리고 나의 의식이나 기억 속에서 발굴해내기를 기다리는 존재들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나와 이웃과의 사이에 있었던 관심과 애정, 그것들의 소중함도 깨닫고.

같은 강물일지라도 청명한 가을날엔 투명한 물빛이 가슴을 쏴악 씻어준다. 그 물빛에 짙고 고요한 정신의 내면을 비춰볼 수 있을 것이다. 세월이 갈수록 옅어지는 감동, 어느 여행 때는 경이롭게 보았던 풍물도 마음가짐에 따라 평범해 보일 수 있다. 나 자신과 주변 인물들에 대해 염증이 나면 도피성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대자연 속에서 우리 인간은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 미미한 존재임을 확인했고 인간을 초월하는 대자연의 에너지에 압도되어 돌아왔다.

다양한 방향으로 삶의 통로를 열어놔야 할 것이다. 여행을 통한 다양한 시선의 관찰과 사색으로 가꾸는 삶의 질, 자기가 처해 있는 곳에서라면 무심하게 보아 넘길 수 있던 바위 하나가 여행지에서라면 기묘하게 여겨지면서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입력되기도 한다. 내가 선의의 눈빛으로 보면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풍경과 정물, 그것들이 기억 속에 남아 꺼지지 않고 빛나는 별이 되리라.

자동시야검사기에 별빛이 나타나도 내가 식별해내지 못하면 나의 시야범위는 넓지 못하다. 신체적인 결함의 시야는 넓을 수 없을지라도 나의 여행지도는 넓게 그려보고 싶다. 경이롭고 신비한 만남에서 빛났던 별들로 여행지도를 넓게 그려보고 싶은 나의 욕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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