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처럼 가늘게 내리는 안개비, 안개보다는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는개, 는개보다는 굵고 가랑비보다는 가는 이슬비, 이슬비보다 더 굵게 내리는 비가 가랑비, 이것이 빗방울의 굵기(또는 가늘기)에 따른 가는비의 서열이다. 이밖에 실같이 내리는 실비, 가루처럼 뿌옇게 내리는 가루비, 보슬비와 부슬비도 가는비의 한 가지다.

사전에 가는비는 올림말로 실려 있는데, 굵은비라는 낱말은 없다. 대신 노드리듯 오는 날비, 채찍처럼 굵게 좍좍 쏟아지는 채찍비, 굵직하고 거세게 퍼붓는 작달비, 빗방울의 발이 보이도록 굵게 내리는 발비, 물을 퍼붓듯 세차게 내리는 억수, 이것들은 장대비, 줄비, 된비, 무더기비 따위와 함께 모두 큰비를 나타내는 이름들이다.

좍좍 내리다가 금세 그치는 비는 웃비, 한쪽으로 해가 나면서 내리는 비는 해비, 햇볕이 난 날 잠깐 뿌리는 비는 여우비, 겨우 먼지나 날리지 않을 정도로 오는 비는 먼지잼이라고 한다. 눈보라가 있으니 당연히 비보라도 있다. 거센 바람에 불려 흩어지는 비보라, 빗방울 대신 꽃이 날리면 꽃보라, 꽃잎이 비처럼 떨어져 내리는 꽃비. 시어로 쓰면 좋을 아름다운 말들이다. 꽃비를 뒤집으면 비꽃이 되는데, 비가 오기 시작할 때 몇 낱씩 떨어지는 빗방울이 바로 비꽃이다. 이마에 빗방울 하나가 떨어져 하늘을 쳐다볼 때 이제 "아, 비꽃이 피는구나" 이렇게 말하자.

꼭 필요할 때 알맞게 내리는 비를 단비라고 하는데 얼마나 비가 반가웠으면 달다고 했을까. 비를 애타게 기다리는 농민들의 마음이 가슴에 와 닿는 말이다. 단비보다 더 단 것이 꿀비, 나아가서 약비, 복비라고 불리는 비도 있다. 모종하기 알맞은 때에 오는 모종비, 모를 다 낼 만큼 흡족하게 오는 못비 같은 것들이 이런 고마운 비의 이름들이다. 여름에 내리는 비는 잠비라고 하는데, 여름에 비가 오면 할 일이 없으므로 잠을 많이 자게 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일찍이 조정권 시인은 비를 바라보는 마음의 형태를 일곱 가지로 나눈 바 있지만, 우리 같은 술꾼들에게 비를 바라보는 마음이란 둘일 수가 없다. 비 내리는 날 술을 마시는 것은 빗방울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땅으로 떨어지는 이치와 다를 것이 없다. 술꾼들은 자기 안에 감춰진 슬픔들을 불러내는 비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면서 더 큰 슬픔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모든 비는 똑같다. 술비인 것이다.

 

출처:도사리와 말모이, 우리말의 모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