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그 통속의 자리 / 최재남
찰카닥, 현관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가 떠났다. 의식적으로 시간을 본다. 월요일 아침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둘러 나간 모양이다. 창밖을 보니 저 멀리 산자락이 불그레하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이구나. 그가 떠난 자리에 동그랗게 잘린 사과껍질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포트의 물 끓이는 소리, 전자레인지 돌리는 소리, 달그락달그락, 문 하나를 두고 그가 행하는 모든 것들이 분주하다. 그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만 나는 모른 체 한다. 그가 먹는 건 상을 차릴 정도의 아침이 아니다. 간단하게 떡이나 고구마, 빵으로 아침을 대신하면서 특별히 해줄 게 없다는 핑계로 나서지 않게 되었다.
밥으로부터의 자유, 아침상 차림으로부터의 자유가 그것이다. 내 방에서 숨어서 그의 행동을 듣는다. 이른 시간 잠자리에 들고 새벽에 깨는 그의 시간과 늦게 자고 대충 자는 나의 잠버릇이 맞지 않아서 각방을 쓰기 시작했다. 잠이 많지 않은 나는 그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뒤척이면서도 나서지 않는다.
처음부터 모른 척, 했던 건 아니다. 당연히 결혼과 동시에 그의 아침상을 차렸고, 도시락을 쌌으며 그런 일들이 오롯이 내 몫으로 되었을 때, 어른이 되었다는 뿌듯함도 있었다. 회사가 멀었기 때문에 일찍 일어나 국을 끓이고 밥을 해서 아침을 먹여 보냈다. 잘 다녀오세요, 손도 흔들어줬다.
육십에 퇴직했을 때 늦둥이 유학자금을 걱정하면서도 여전히 국을 끓이고 반찬을 해댔다. 밥은 그와 나를 연결하는 고리였고, 의무였으며 삶의 지표였다. 집에서 하던 밥을 나가서도 해봤다. 적은 돈으로 할 수 있는 걸 찾다가 직장인이 많은 빌딩에 국수가게를 냈다. 처음에는 계산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바빠 돈 버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러나 초조와 오기로 시작한 일은 얼마 가지 않아 계산 착오였음이 드러났다.
섣불리 뛰어든 장사가 인건비에 매달 나가는 재료비, 높은 수수료까지 만만찮았다. 예고도 없이 결근하는 주방 식구들 때문에 동동거리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3시간씩 출퇴근해야 하는 거리로 얼굴은 수척해갔다. 먹을 것만 해주면 뭐든지 돈이 될 거라 믿었던 내가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였음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밥에 대한 무한한 긍정적 믿음은 쉽게 무너졌다. 밥은 결코 돈이 되지 않았다.
지겨웠을 법한 상황에서 벗어난 건 그의 뒤늦은 취직 덕이었다. 재취업이 되고 전생에 덕을 쌓아야만 할 수 있다는 주말부부를 3년 정도 했다. 떨어져 지내는 동안 적당히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는 게 버릇이 되었다. 웬만하면 각자 알아서 처리하고,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서로를 간섭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렇게 늙어가는 중이다.
전기밥통 속에서 밥이 익어가는 그 평화롭고 비린 향기에 나는 한평생 목이 메었다.
이 비애가 가족들을 한 울타리 안으로 불러 모으고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아 밥을 벌게한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 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 나는 밥이라는 것이다. - 김훈의 '밥벌이의 지겨움' 중에서
김훈의 말처럼 밥벌이의 지겨움 못지않게 매일 밥상을 차려야 하는 주부의 고됨도 만만찮다. ‘진저리 나는 밥’은 나와 무관하지 않다. 나의 의무이자 권리이며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일이다. 그의 말처럼 ‘한두 끼를 먹어서’ 해결될 일도 아니다. ‘죽을 때까지 반드시 먹어야’ 하고, ‘진저리 나는 밥’을 죽을 때까지 차려야 한다.
오늘은 뭘 먹이지? 밥을 먹어주는 사람과 밥을 차려주는 사람과의 입장은 현저히 다르다. 주부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밥은 의무였고 당연한 권리이기도 했다. 주체가 나라서 계획도 일정도 모두 내 특권에 속한다. 식구들 입성에 맞게 다듬고 찌고 볶는 그 자체만으로도, 존재에 대한 확고한 의식이 있었다.
나이가 들어 몸이 둔해질수록 먹거리의 지겨움이 앞선다. 또 먹을 때가 됐군, 오늘은 또 무얼 먹나, 무얼 해야 영양에 손색이 없고 무얼 해서 맛있게 먹일까보다, 무얼 해야 손이 덜 가고 쉽게 만들어서 먹이나로 귀결된다. 이것저것 맛있게 먹이고자 애쓰던 마음이 점점 멀어지고, 이제 의무에서 오는 권태만 남았다.
마음을 놓았다. 친정에 가면 며칠씩 묵어 누렇게 뜬 밥을 먹는 게 싫었다. 회유와 만류에도 소용없었다.
우리 집에 다니러 올 때도 밥솥을 신줏단지 모시듯 끌어안고 왔는데, 그 속에 밥이 그득했다. 일주일 내내 그 밥을 먹어치우느라 진저리가 났다.
"하루 종일 밥만 먹고 내가 벌레 같구나"
아침 식사가 끝난 어느 날 식탁을 닦다가 어머니는 불쑥 그런 말을 했다. 표정이 없는 어머니 얼굴을 쳐다보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이 벌레 같다고, 멍한 시선의 공허한 목소리는 귓가를 맴돌았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그냥 가만히 앉아 계시라고, 이젠 그럴 때라고, 너 혼자 동동거리는데 뭐라도 도와주고 싶다는 어머니에게 나는 가만히 계시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했다. 마늘을 까겠다는 걸 간신히 뜯어말리고, 여기저기 뒤지고 다니면서 무언가를 찾아대는 어머니가 성가셔 가만히 계시라고 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머니의 의식 속엔 밥이 삶의 전부였다. 밥은 어머니를 대신하는 가치요, 건재함을 알리는 수단이었다. 평생 밥하는 일에서 벗어나지 않았듯 마치 그것이 자신을 나타내는 전부인 양. ‘이거 봐, 나 아직도 쓸만하다니까’ 자랑하듯 멈추지 않고 밥을 해댔다.
어머니에게 밥은 단순히 연명이 아니라 자신의 영역을 나타내는 표시였다. 완전히 쓰러져 누울 때까지 어머니의 머릿속을 차지 한 건 밥이었다. 한 가지 의아한 것은, 평생 소식만 하던 분이라는 것과 그다지 밥에 집착할 만한 애정을 가졌던 분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지겨워하는 것을 어머니는 그토록 하고 싶었다는 게, 병들어 쓰러질 때까지 자신이 해야 할 일임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게, 새삼스러워 숙연해진다.
밥은 순환이다. 돌고 돌며 생명을 낳고 삶을 이어간다. 밥에 얽혀 살았고 밥에 의해 죽을 것이다. 그 엄숙한 자리에 밥은 존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