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꾼의 아내 / 조미순

 

제 외조부 함자는 김 윤자 제자십니다. 나주 목사로 있다가 관직에서 물러나 광주 충효리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환벽당環碧堂이란 정자를 지어 자연과 벗하며 후학도 길러내셨지요. 어느 날 오수에 들었던 조부가 앞 개울에 용 한 마리 놀고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냇가를 살펴보라, 사람을 보냈어요. 이날의 우연이 내 삶에 선명한 획 하나 긋게 될 걸 어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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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개울에서 땀을 씻던 정철은 유배 풀린 부친과 조상 유택이 있는 전남 창평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외조부 눈에 십 대 중반의 소년이 비범하고 영특해 보였답니다. 문하에 두고 글을 가르치셨지요. 내심 제 배필로 점 찍으셨던 겁니다. 당시 여자들 삶이 그랬듯 혼인 당사자인 제 의지는 무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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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들이 왕실과 혼인하면서 한때 잘나가던 집안이었다지요. 그가 열 살 되던 해 을사사화(1545년)란 폭풍에 휘말렸답니다. 매형 계림군이 무고誣告로 처형되고, 맏형이 매 맞아 죽고, 부친과 유배지를 떠도느라 공부할 기회도 잃었지요. 할아버지가 소년에게 품을 내어주듯 저도 ‘사연 많은 새’에게 기꺼이 마음을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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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 아래 지실마을에 살게 되면서 남편의 학문이 익어갔습니다. 문학적으로도 뛰어난 인재들과 교유하며 절차탁마했지요. 이십칠 세 때 문과 별과에 장원급제하자 어릴 적 배동으로 함께 놀았던 명종이 기뻐했습니다. 사헌부 지평 벼슬을 내렸어요. 벼슬살이 잘하리라 믿었는데 그의 강직함과 편협함이 임금과 마찰을 일으켰습니다. 명종 종형이 처가 재산 뺏으려고 처남을 죽인 사건이 있었지요. ‘봐달라’는 왕의 신호를 무시하고 처형해 버렸습니다. 괘씸죄로 눈 밖에 나 한동안 낮은 벼슬자리를 전전해야 했지요. 술을 더 찾은 게 아마 이때부터였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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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아, 제발 술을 줄이고 말도 삼가게나” 친했던 율곡 이이가 거듭 충고했습니다. 남편을 눈여겨보던 선조가 은잔까지 하사하며 “하루에 한 잔씩만 마셔라” 절주 권유도 뒤따랐습니다. 쇠귀에 경 읽기였죠. 속상해하는 저를 보고 주변 사람들이 위로의 말을 꺼냈습니다. 당신 남편 술 과한 것 말고는 참 괜찮은 선비라구요. 속에서 천불이 나더군요. 술이 들어가면 다른 인격체가 되어버리는 존재를 오롯이 겪으며 사는 게 어떤지 아냐? 함부로 편들지 말라 소리치고 싶더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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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장진주사將進酒辭〉라는 시는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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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 꺾어 술잔을 세며 무진무진 먹세그려/이 몸이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줄로 꽁꽁 묶어 매어 가나……/가는 비, 굵은 눈, 회오리바람 불 때/ 누가 한잔 마시자고 할 것인가….

 

죽으면 누가 술을 권하겠냐며 무진무진 먹자고 태평스럽게 응수했습니다. 하긴 그가 술을 탐닉하게 된 데에는 그만한 사연들이 있긴 해요. 혹시 계곡 암반에 만들어진 돌개구멍이란 걸 본 적 있나요? 물이 흐를 때 바위의 갈라진 틈이나 오목한 곳으로 모래나 자갈이 들어가 소용돌이치며 암반을 깎습니다. 유속이 빨라질수록 수량이 증가해 물은 더 빠르게 돌죠. 돌개구멍은 점점 커집니다. 남편의 내면에도 긁히고 팬 구멍이 여러 개 있답니다. 그걸 보는 내 마음에도 숭숭 구멍이 뚫렸습니다. 대신 아파 줄 수 있다면 정말 그러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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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겪은 을사사화는 눈앞에 벼락이 떨어지는 충격이었을 겁니다. 우르릉 쾅쾅 모든 게 부서져 내렸습니다. 그는 자주 유년 시절의 악몽에 시달리곤 했지요. 서른 중반에 부친과 모친을 3년 간격으로 잃고 상심할 때, 그림자조차 물기가 뚝뚝 흘렀습니다. 듬직했던 맏아들을 잃고, 과부로 살던 둘째 딸까지 죽자 피눈물 쏟던 남편…. 젖은 제 옷소매로 그의 슬픔까지 닦아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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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정여립의 모반 사건 때 최고 재판관인 위관이 되어 동인 세력을 제압한 일 아시죠? 기축옥사(1589년) 말입니다. 입에 올리려니 혀까지 마비될 것 같습니다. 호남 사림 천여 명 피바람 불던 숙청 때, 이 남자 속이 속이 아니었다는 걸 누가 알까요? 사람 할 짓 아니라며 멈추려 했지만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이었습니다. 그가 옥사를 다스릴 적에 술기운이 있어 관을 삐딱하게 썼으며, 말이 빠르고 사나웠던 건 무기력한 자신에게 화가 나 자학하듯 술을 퍼마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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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왜 소용돌이의 중심에 섰는지 저는 압니다. 그가 쓴 가사 <사미인곡思美人曲>과 <속미인곡續美人曲>이 말하고 있잖아요. 그것은 선조를 향한 ‘연군가’ 였습니다. 왕의 심사를 대변해 사람 백정으로 전락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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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남편이 세자 책봉 문제로 선조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었지요. 왕은 선비들 죽음의 책임까지 뒤집어씌워 그를 파면하고 위리안치시켰습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말입니다. 통곡이 나옵디다. 남편이 진작 정치를 떠나 시나 쓰면서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목숨 걸고 말리지 못한 게 후회됩니다. 가사문학의 일인자로서 술을 평생의 벗으로 두었다면 사람들은 그걸 풍류라 너그럽게 봐주지 않았을까요. 물론 술꾼의 아내라는 진절머리 나는 제 입장은 마찬가지였을 테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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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분과 빈한貧寒으로 병을 얻은 그가 쉰여덟 살에 눈을 감았습니다. 파란만장한 정치역정을 마치고 비로소 편해진 모습에 제 슬픔도 씻겨나갔습니다. 돌개구멍을 채우고 있던 아픈 기억이 빠져나간 자리에 눈길이 가닿습니다. 물살에 깎인 바위가 어쩐지 술잔을 걸어 둔 모양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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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괘酌掛에 가양주 한가득 채워 그에게 권하고 싶어집니다. 남편이 가가대소呵呵大笑하겠지요. 내 잔에도 철철 넘치도록 따라 술과도 화해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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