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 정리 / 임춘희

걸음을 멈춘다. 목적지를 향해 앞만 보고 가다가 오던 길로 몸을 돌린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른다.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빽빽하게 걸려 있는 옷을 걷어낸다. 언제 적 입었던 건지 기억도 없는 옷들이 방바닥에 산을 이룬다.

오래전부터 나에게는 옷장 정리가 숙제였다. 벼르고 벼르던 일이었는데 느닷없이 저질렀다. 버리려니 아깝고 입으려니 유행이 지난 거 같아 쌓아둔 옷이 방 한 칸 차지했다. 사 놓기만 하고 한 번도 입지 않았던 것도 있었다. 옷 욕심은 있어서 백화점이나 아울렛에 가면 빈손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성격을 누가 말릴 수 있으랴. 생각 없이 살아온 것은 아닐까.

휴일 아침 사우나를 함께 즐기던 아낙이 던진 말에 잠시 생각을 멈췄다.

“나는 2년 이상 입지 않는 옷은 정리합니다. 그거 넣어 둬 봐야 짐만 되어요. 남에게 주더라도 오래된 옷은 주고도 욕먹는다니까요. 내가 아깝다고 생각할 때 줘야지 상대방도 기분 좋게 입지 않겠어요. 못 입는 것이 아니라 안 입는 걸 주는 게 예의입니다.”

아낙의 말이 맞았다 싶어 나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쳤다. 반사적인 행동으로 너무 세게 친 탓에 허벅지는 금방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그래, 언제 날 잡아 정리하자.’

그러나 쉽지 않았다.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터라, 날이 날인 만큼 갑작스레 옷장 정리를 했다. 미니스커트부터 핫팬츠에다 배꼽 티셔츠까지 죄다 꺼내 놓고 보니, 그때그때 이유가 있는 지난 삶이 물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저만치서 30대 여인이 간당간당한 모습으로 걸어왔다. 찰랑한 단발머리에 탱탱한 볼살이 미어터질 것만 같은데, 가까이 다가선 모습을 보니 불만이 가득하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값진 젊음이 있는데 왜 그러냐고 물었다.

‘말도 마세요. 난 지금 다 싫고 남편과 아들 둘, 우리 네 식구만 홀가분하게 한번 살아 봤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휴일이면 늦잠 자고 싶은데 마음뿐, 새벽부터 시아버지가 일어나 대문 들락여 불안하지요. 그것뿐인가요. 칠 남매 맏며느리여서 어린 시동생과 시누이 함께 살아야 하니 할 일이 태산입니다. 홀시아버지 모시는 일이 어디 쉽습니까.’

‘아, 그랬구나. 젊을 때 하고 싶고, 가고 싶은 곳이 많았을 텐데 맘고생이 많았겠다.’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핫팬츠와 빨간색 티셔츠, 그리고 체크무늬 원피스와 낡은 청바지까지 마대에 담는다.

주방으로 가서 커피 한 잔 들고 와 옷장 앞에 다시 앉는다. 40대 여인이 씩씩하게 걸어온다. 짧은 컷트 머리가 단정하다 못해 날카로워 보였다. 앞머리는 올백으로 넘겼고, 남자처럼 검은 정장을 입은 모습이 카리스마가 철철 넘쳤다. 여인은 한참 눈을 맞춘다. 겉으로 보기엔 강한 것 같아도 마음은 바람에 풀풀 날리는 빈 비닐봉지 같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느냐고 물으니 말없이 울기만 한다. 여인은 40대 젊은이 손을 꼭 잡아 준다. 그녀는 한동안 어깨 들썩이며 흐느끼더니 조심스럽게 입술을 띤다.

‘나는 지금 어느 남자에게도 여자로 보이기 싫습니다. 특히 거래처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여자로 보이면 일을 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성공한 인생은 물 건너가겠지요. 여자가 아닌 강한 사람으로 보여야 합니다. 내면은 아주 여린 여자임이 분명한데 남들이 알면 쉽게 볼까 봐 일부러 억센 사람처럼 행동해요. 사실은 자신도 통제할 수 없을 때도 있어요. 멋진 남자 보면 일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데이트하고 싶단 말입니다. 주말 되면 여행을 다니고요. 그래도 그럴 수 없잖아요. 한창 커 가는 자식이 있으니까요. 하루빨리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요. 나이 먹으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거잖아요.’

여인은 그 젊은이를 다독인다. 인생은 다 그런 거라며. 지금 당장 주어진 현실이야 힘들겠지만, 세월이 흐른 후에 이 순간을 돌아보면 아름답고 값질 것이라며 두 손을 꼭 잡는다. 여인의 등 뒤엔 이별할 옷들이 수북하다. 헌 옷 상자에 들어갈 것들은 마대에 넣고 말끔한 옷은 보따리에 싼다.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이번엔 제법 안정되어 보이는 모습을 한 오십 대 여자가 다가온다. 호탕한 웃음 한 바구니 쏟아낸다. 큰소리로 웃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답답한 속을 털어내려면 그렇게라도 해야지 아니면 속병 날지도 모른단다. 여인은 조심스럽게 오십 대 여자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오십 년이 넘도록 세상 살다 보니 별일을 당하네요. 사기를 당했습니다. 그것뿐인가요. 뼈가 부서질 정도로 일을 해서 한 푼 두 푼 모아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는가 싶었는데, 주위 사람 때문에 부도 맞고 집 한 칸 없는 삶을 살아 봤습니다. 그 어려웠던 세월을 일일이 말할 수 없어요. 산전수전 공중전에다 우주 전까지 겪은 이야기를 어찌 표현을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이를 물고 열심히 살아왔지요. 그래도 이 세상에 와서 장승 같은 아들 둘 얻은 것만으로 된 것입니다.’

여인은, 통쾌하게 웃고 있는 그를 빤히 쳐다본다. 옷에 담긴 사연과 세월을 읽으며 가슴 아파할 동안 옷장은 어느새 훤해졌다. 지난날 탄력 있고 잘록한 허리가 좋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붙잡아 놓을 수는 없는, 그리고 붙잡혀지지도 않은 일이라 시절 시절마다 입었던 옷들을 미련 없이 꺼냈다.

여인 앞에 서 있는 건 뭐람. 고목처럼 굵어져 있는 허리와 묵직한 몸매다. 겉보기엔 그다지 예쁘지는 않아도 그렇다고 미운 건 더더욱 아니다. 허리 굵기와 몸무게만큼 삶이 단단해지고 안정적이었으리라 생각하니 흐뭇하다. 눈앞에 보이는 건 널찍한 옷장이다. 앞으로의 삶은 여유롭고 편안하리라는 생각을 하며 정리정돈된 문을 닫는다. 옷장에서 제외된 옷이 환경 오염에 주된 범인이라고 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버릴 건 버려야 하지 않을까.

오월의 바람이 분다. 담장엔 줄장미가 빨갛게 피어서 깨금발을 하고 있다. 옷장 정리를 끝내고 현관문 여는 여인을 빤히 쳐다본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