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큰 / 최윤정

지배인이 손가락에 낀 꾸러미를 찰찰 흔들었다. 엽전인가 했는데 다시 보니 토큰이다. 한 달 치 차비를 바꿔 끈으로 꿰었다고 한다. 한 달 치 버스비가 얼마나 되겠냐마는, 나는 용산에 자가 아파트도 한 채 있다는 그가 호기롭게 흔드는 꾸러미 소리에 맞춰 그날도 잉잉거리며 졸랐다.

-지배인님 저랑 결혼해 주세요. 제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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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일 컷 아래 반쯤 드러난 반듯한 이마, 외꺼풀이라 졸린 듯하지만 한곳을 응시할 때면 농농 매서워지는 눈매, 동양인치고는 날렵하고 높은 콧날, 끝에 힘을 주고 다문 듯 조뼛한 입술, 이 모든 이목구비를 모아 끝에서 잡아 비튼 듯 턱이 살짝 왼쪽으로 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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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말을 무시한 채 밥이나 먹으라 했다. 대충 그린 순정 만화 남주 같은 외모의 그는 현실 세계로 튀어나와 갖은 풍파를 겪은 듯 암암 피곤해 보였다. 나는 툴툴 주방으로 들어가 밥이나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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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등록금이 없어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던 나는 가고 싶었던 대학교 근처에서라도 살아보겠다고 옷 가방 하나 들고 무작정 서울로 왔다. 노량진 고시원에 짐을 풀고 동네를 발발 돌아다니며 종업원을 구한다는 곳은 모조리 들어갔다. 서울 사람들은 어찌 기가 막히게 촌뜨기를 알아보는 것인지 가는 곳마다 휘휘 퇴짜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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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숍인 줄 알고 들어간 곳의 마담이 다리를 꼬고 앉아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이미 사람 구했다고 했다. 여기요, 저기요, 왈왈 북새통인 분식집에서는 내가 김밥 한 줄 못 말게 생겼던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어떤 곳은 사장이 없으니 나중에 다시 오라 했고 어떤 곳은 사장도 아닌 이가 꼬치꼬치 캐묻곤 그냥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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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동네를 휘젓다 소득 없이 털털 돌아오는 길에 호프집 서빙 구함이라고 써 붙인 종이를 봤다. 마지막이다, 생각하며 컴컴 계단을 내려갔다. 아직 영업 전인 홀은 비어 있고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스크린에서 마돈나의 뮤직비디오가 무음인 상태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텐에 턱을 괴고 있던 남자가 약간 휜 턱을 까닥이며 가까이 다가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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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가 내게 뭘 물어봤었나? 곰곰 떠올려보려 해도 기억이 안 난다. 숨길 수 없던 사투리에 어디서 왔는지는 물어봤었나 보다. 나를 경주에서 왔다고 이름 대신 ‘경주’라고 불렀다. 나는 바로 채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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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하던 yes 호프는 노량진 고시촌에서 가장 큰 호프집이었다. 테이블이 쉰다섯 개로 단체석까지 널널 이백삼십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홀을 쉭쉭 종횡무진했다. 낮엔 공부하고 저녁에 잠깐 하는 아르바이트로는 늘 돈이 부족했고 쫄쫄 배가 고팠다. 호프집에서 내 사정을 알고 일찍 와서 끼니를 해결하라 했지만, 꼴에 자존심이 있어서 그런 밥은 먹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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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아끼려 창문이 있는 방에서 여섯 명이 한방을 쓰는 지하 다인실로 옮겼다. 그 와중에 돈 빌려달라는 엄마에게 오만 원, 십만 원 붙여주며 살았다. 모두 잠든 새벽 세 시, 고시원 공용 냉장고에서 유통기한이 삼 주 지난 우유를 훔쳐 먹었다. 우유가 상해서가 아니라 훔쳐 먹었다는 사실 때문에 밤새 끙끙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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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열이 나고 아팠는지, 배가 고팠는지, 화가 났는지 얘기하고 싶어도 아버지가 고아로 거리를 떠돌며 쓰레기통을 뒤진 이야기만은 못하고 얼음을 깨고 대식구 빨래 했다는 외할머니 입김만도 못하다는 걸 알아서 흘흘 혼자 아프고 슬슬 혼자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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꿉꿉 벽지가 늘어지는 지하방에서 쥐새끼들처럼 꼭꼭 웅크리고 자는 언니들을 보면서 내 서울 생활도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일일 예감했다. 경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때부터 지배인에게 결혼해 달라고 몇 달을 갈갈 졸랐다. 용산에 있다는 그 아파트 문간방 하나만 내주면 훌훌 더는 소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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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텅 그 넓은 집 혼자 살기 외로울 텐데 요요 작고 똘똘한 내가 살살 청소도 하고 싹싹 빨래도 하고 칙칙 밥도 해주겠다 냥냥거렸다. 팔팔 스무 살 내 말을 들은 척도 안 하는 지배인, 서른여섯 살의 정중채 씨에게 씩씩 약이 오르고 어떤 날은 학학 화가 났다. 생생 어린 여자가 왜 싫으냐고도 달달 물었다. 흠흠 정중채 씨는 대답 대신 노끈에 양양 토큰을 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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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무렵, 미스코리아처럼 보이는 여자가 쭉쭉 긴 다리가 돋보이는 짧은 치마를 입고 서 있었다. 정중채 씨가 소믈리에 앞치마를 벗어 접어놓고 바텐 밖으로 나왔다. 허리를 꼿꼿 세운 채 도도하게 있던 여자가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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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로 걸어가던 정중채 씨가 깜박 잊은 것이 생각났다는 듯 뒤돌아 내게 왔다. 그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토큰 꾸러미를 끌러 내게 쥐여주고 스무 살 내 생애 본 가장 아름다운 여자와 팔짱을 끼고 형형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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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둘 굴러다니는 동전을 모아둔 저금통에 토큰 몇 개가 아직 있다. 이제 토큰을 사용하는 곳은 없지만, 버리기도 뭣해서 넣어뒀다. 나는 정중채 씨에게 받은 토큰을 싹싹 쓰지 못했다. 월급으로 방값을 내고 더 버틸 이유가 사라져서, 촌뜨기가 경쟁해서 이기기에 그녀의 외모가 너무해서, 공용 냉장고엔 더는 훔쳐먹을 상한 음식이 없어서 고향으로 내려와야 했기 때문이다. 판판 진짜 그런 이유 때문에 고향으로 내려와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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