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방울꽃 / 공순해

 

 

걷기 알맞은 날씨다. 천연하게 자란 꽃들이 숲속 길섶에 얼굴을 드러내고 환한 미소로 반긴다. 같이 미소로 응답하며 풀꽃 앞에 무심코 주저앉았다. 살짝 풍겨 오는 향기가 머리를 청신하게 한다. 무슨 꽃이지? 깨닫고 보니 은방울꽃이다. 틀림없이 행복해집니다 꽃.

‘틀림없이 행복해집니다’는 꽃의 꽃말이다. 혹은 행복을 다시 가져다 준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그래서일까, 유명 여배우들의 결혼 부케에 꼭 들어가는 꽃. 심지어 여왕의 꽃이란 별명도 있다.독일 화가 프란츠 자베르 빈터할터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가족을 위해, 아서 왕자의 첫 생일을 기념하여 그린 초상화에도 이 꽃이 등장한다. 경건한 분위기의 그림엔 아기 예수처럼 표현된 어린 왕자가 이 꽃을 들고 있다. 최근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결혼식 부케도 이 꽃이었다. 그는 70년 간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영위했다. 여왕 장례식에 가장 많이 쓰인 꽃도 이 꽃이다. 그뿐 아니라, 유럽에서는 5월을 여는 1일 노동절에 은방울꽃을 주고받는 문화가 있단다. 행복을 고양시키고자 하는 기원의 행위라고 보면 될까.

행복을 약속하는 꽃 앞에서 슬그머니 슬픈 한 사람이 끼어든다. 얼굴도 모르는, 그러나 뇌리에 깊이 박혀 있는 슬픈 존재. 그는 불행했던 사람에게 어린 시절의 전설이 부록으로 꼭 따라 붙듯 영민하고 신중한 아이였단다. 한 집안의 장남이었던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로 자랐다. 훌륭한 신랑감으로 근동에 소문이 나 여러 집에서 사위 삼고 싶어 했다. 하여 아름답고 출중한 처자를 맞아 약혼도 했다. 바야흐로 미래가 방장하게 펼쳐질 무렵, 그는 알 수 없는 병에 걸렸다.

온갖 탕약으로 고임 받으며 열흘쯤 고열에 시달렸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게 됐을 때 그는 더 이상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가 아니게 되었다. 다리가 펴지지 않았다. 그의 삶에 비추던 빛이 일시에 꺼지며 그는 앉은뱅이란 꼬리표를 달고 살게 되었다. 약혼이 깨지고 삶의 카오스가 그를 삼켰다. 당시엔 장애를 집안의 저주로 여겼기에 아예 존재 자체를 숨겼다.

장남의 자리는 동생에게 돌아갔다. 가산과 제사도 당연히 동생에게 돌아가고 그는 동생에게 기숙하는 존재가 됐다. 집안의 기둥으로 한몸에 기대를 받던 존재에서 남 앞에 나서면 안 되는 존재가 된 그는 집안의 부끄러움이었기에 숨어지내야 했다. 유일하게 허락된 외출은 뒷산에 나무하러 가는 일이었다. 농촌의 경제가 가족의 노동 경제였기에 들일을 할 수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누구 눈에 띄지 않는 나무하기였다.

사는 날의 유일한 즐거움은 일 년에 두 번 작은 동생 집을 방문하는 일이었다. 날이 풀리는 오월쯤, 추수가 끝난 시월쯤 그는 작은 동생 집에 가곤 했다. 오월이면 은방울꽃을 등에 지고, 가을이면 가을꽃을 등에 지고 앉은 걸음으로 이웃 마을에 사는 동생 집을 방문했다. 꽃을 받아들고 환하게 웃는 막내 조카를 기쁘게 하고 싶어서 고단한 줄 모르고 갔다.

그 막내 조카가 남편이었다. 내가 그 댁에 갔을 땐 이미 돌아가고 안 계신 분이었지만 더욱이 누구도 그 분에 관해 입밖에 꺼내지 않았기에 존재 자체를 아예 알지 못했다. 세상에 왔다 갔는데도 흔적도 없이 자취도 없이 지워진 분. 그 점이 서러웠던지 남편은 비밀처럼 내게 큰아버지를 고백했다. 전공이 화공이고, 직업이 화학기사인 남편이 꽃을 좋아해 좀 유별스럽다 생각했는데 그런 비극이 있었을 줄이야.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잘 울지 않는 내 가슴 안으로 눈물이 뭉텅이가 되어 흘렀다. 내가 이 분 얘기를 <여로>보다 더 슬프게 써 드릴게. 우습게도 약속해 버리고 말았다. 누구에게나 존재의 이유는 있다. 누구도 타인의 존재를 부정할 권리는 없다. 그 참담함을 그 분은 어떻게 소화하셨을까. 시아버님이 삼 형제이신 줄만 알고 있던 내겐 놀라운 사실이었다. 사 형제의 맏이였던 분의 자서전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 특별한 이야기를 꼭 써 보고 싶었다. 글로라도 존재를 살려드려야 할 것만 같았다.

남편은 큰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이어 말했다. 큰댁에 가면 큰아버지 방에 가서 자야 했는데 풀 빳빳이 먹인 새 이부자리 감촉이 낯설고도 좋았다고. 서걱이는 소리와 느낌이 좋았단다. 또 봄이 오면 산에도 데려가 주셨단다. 그분은 무덤가에 피는 꽃들, 나무에서 피는 꽃들을 잘 보아두었다가 조카가 오면 데리고 가 꺾어 주셨다고. 둘 사이에서만 오가는 마음 때문에 남편은 자주 큰댁에 갔고 은방울꽃 피는 오월이 가장 좋았다고 했다. 큰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남편이 생각보다 빨리 가는 바람에 이야기를 다 듣지 못했던 탓이다. 하지만 오월이 되고 은방울꽃이 필 무렵이 되면 뵙지도 못한 그 시어른이 간혹 마음 갈피에 아른거리곤 한다. 은방울꽃처럼 아름답게 피었다 모질게 꺾인 그 존재가.

오늘도 그 분이 마음 자락에 어른거린다. 추억으로 부활하는 존재가 되신 분. 누구나 행복을 갖고 싶어하지만 거세당하는 사람도 있다. 그 비극을 그 분은 어떻게 극복하고 가셨을까. <보리피리>의 시인 한하운처럼 통절해하며 가셨겠지. 그분은 은방울꽃의 꽃말이 틀림없이 행복해집니다,란 걸 아셨을까? 정말 틀림없이 행복해지고 싶으셨을 터인데. 가장 불행했던 분이 사랑했던 꽃, 틀림없이 행복해집니다 꽃. 그분에겐 부도수표가 돼 버린 꽃. 삶은 아이러니다.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아이러니다.

저쪽에서 구름이 한 덩이 일어난다. 곧 비가 올지도 모르겠다. 일어서 다시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오월이라고 해서 방심해선 안 된다. 언제 비가 내릴지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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