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책도둑의 진술서 / 김응숙 

 

배심원 여러분, 제가 책을 훔친 것은 사실입니다. 계획적인 것이 아니었냐고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우발적이었습니다. 우발적이었다는 정황증거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우선 그날은 가을의 끝자락이었고, 가는 비가 오고 있었고, 따라서 잿빛하늘을 배경으로 단풍이 짙어진 나뭇잎들을 바라보는 제 마음은 이미 현실 세계를 벗어나 있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저는 짧은 여행을 앞두고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는 카페에 홀로 앉아 있었으니, 일종의 심신미약 상태에 놓여있었던 셈이지요. 이것으로도 부족하다면 제 나이가 딱 그날 같은 오십 대 중반이라는 것도 참작해 주십시오.

그 카페는 많은 사람들의 이별과 만남으로 분주한 버스 터미널 앞에 있었습니다. 출발시간이 어중간하게 남은 손님들이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기 좋도록 한 쪽에 서가를 마련해 놓았더군요. 손가락으로 꽂혀있는 책 제목들을 훑으며 살펴보았습니다. 주로『10억 만들기』, 『부자 아빠와 가난한 아빠』 같은 경제 서적(?) 들과 『혼자 가는 뉴질랜드 여행』이라든지 『소호 여행기』같은 여행서적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짧은 시간에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책들을 비치해 놓은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책들 사이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책 한 권을 발견했습니다.

우선 바다처럼 푸른 표지의 색깔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아시지요? 바라보고 있으면 가없이 넓어지고 끝없이 깊어지는 ​색, 파랑 말입니다. 두 손으로 떠보면 눈물처럼 아무 색이 없지만, 흐르고 고여서 푸른 멍이 되어버리는 그 색, 파랑 말입니다. 그리고 표지의 헤진 가장자리도 저의 마음을 끌었습니다. 떠들어대고 싶은 말들로 잔뜩 날이 서 있는 새 책이 아닌 낡은 그 책을 손에 드는 순간, 저는 왠지 조금 슬퍼졌습니다.

평소의 습관대로 출판사나 저자의 약력 등은 읽지 않고 바로 첫 장을 펼쳤습니다. 그 책은​ "…집을 버리고 떠난 후 해가 바뀌었다. 전경린의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의 첫 문장"으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말줄임표로 시작하는 장편소설이었습니다. 그 말줄임표는 앞으로 많은 말들을 하겠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무언의 선언 같았습니다. 강한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그리고 집을 버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도 잠시나마 집을 떠날 참이니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 아닐까요? 저는 막연히 슬픈 운명에 휩싸이는 한 여자를 상상했습니다.

제 상상이 맞았습니다. 그 책 속에는 슬픈 운명을 맞이하는 한 여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여자의 슬픈 운명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혹시 사랑은 아닐까요. 그것 역시 맞았습니다. 어떻게 다 읽지도 않았는데 알 수 있었냐고요? 이 나이가 되면 그만한 눈치는 생기기 마련입니다. 저도 여자인데다 소설이 아닙니까.

책의 앞부분은 여자가 남편의 배신으로 인해 저 창밖의 비처럼 차갑고 눅눅한 실을 자아내며 스스로를 어둡고 좁은 고치 안으로 밀어 넣는 과정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그 이후 여자의 심리적 변화는 몽환적으로 표현하는 작가의 솜씨에 홀딱 빠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느꼈지요. 여자가 고치 속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다시 빠져나오기 위함이고, 그전과 그 후의 여자는 많이 달라져 있을 거라는 것을요. 그리고 그 고치에 칼집을 내어 여자가 나올 수 있게 할 사람은 결코 남편이 될 수 없다는 사실까지. 어떻게 그리 잘 알았냐고요? 그것도 연륜이라고 해두죠.

아니나 다를까, 여자가 우체국 앞에서 낯선 남자와 마주치더군요. 제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카페 벽에 달랑 하니 붙어있는 둥근 시계가 차 출발 시간을 확인하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이 아닙니까. 겨우 십 분 정도 남았으니 당장 자리에서 일어서야 했습니다.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홈까지 걸어가는 시간도 필요했으니까요. 제 가슴이 더욱 거칠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쯤에서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고치에서 나오는 여자의 모습을 목도해야만 했습니다. 그녀가 낯선 사랑에 베여 벌어진 상처의 틈 사이로 눈부신 날개를 밀어내는 장면을 꼭 보고 싶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모든 탈피한 존재들에게는 날개가 주어진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 날개를 보기 위해서는 이 여자를 데리고 가야만 했습니다. ​

​마침 카페 직원이 화장실을 가는지 뒷문으로 나갔습니다. 자동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릴 때는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어코 그 푸른 책과 함께 카페 문을 나섰습니다.

밖으로 나오니 찬바람이 불고 제법 날씨가 쌀쌀했습니다. 빗줄기도 날리고 어두워지기 시작하더군요. 사실은 금방 후회를 했다는 것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제가 양심적이어서가 아니고, 찬바람과 함께 이 이야기의 결말이 가슴을 파고들었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날개는 고치를 비집고 나오자마자 빗줄기에 젖고, 거세게 부는 세상의 바람에 갈가리 찢길 것입니다. 다시 날지 못하게 된 날개는 어두운 거리에서 뭇사람들의 발길에 짓밟혀 문드러지겠지요. 잠시 눈부신 날개를 바라본 대가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아야 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날 밤 푸른 책 속에 빠져 그녀를 끝까지 따라가본 결과, 제 느낌이 빗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녀는 처참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원한대로 그 잔인한 과정을 낱낱이 목도했습니다.

굳어진 가슴을 뻐개고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습니다. 무지 아팠습니다. 그리고 새삼 깨달았습니다. 인간의 모든 사랑은 ​ 끝없이 파괴를 동반한다는 것을. 어쩌면 사랑의 본질은 파괴가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 들었습니다. 고치를 찢고 태동된 사랑은 가슴을 찢으며 사라져갔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후회했습니다. 너무나도 아픈 이 여자의 사랑을 잠시나마 훔친 제 자신을.

며칠 뒤에 저는 아주 쌈박한 새 책을 그 카페에 몰래 갖다 놓았습니다. 물론 그렇게 했다고 해서 제가 책을 훔쳤다는 사실이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배심원 여러분, 여러분도 가슴이 잊어버린 ​ 것들을 문득 만날 때가 있지 않나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저 손을 흔들며 안녕을 고하나요? 더욱이 비 오는 늦가을 오후, 터미널 앞 카페에서 가슴이 시리도록 푸른색 표지의 책을 만났을 때 말이죠.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없을 거예요.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님 '영원한 가객 김광석의 노래 가사 중 일부,'을​ 이제 충분히 알았으니까요. 그저 한번만 너그러이 선처해 주시면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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