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쏘시게 / 곽흥렬
벽난로에 불을 지핀다. 세상만사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있을까만, 벽난로 불붙이는 일 역시 생각만큼 그리 만만치가 않다. 거기에도 나름의 요령이 숨어 있는 까닭이다. 착화 순서를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적잖이 고역을 치러야 한다. 그 절차가 번거롭고 귀찮아서 몇 번 써보다 내버려 두어 쓸데없이 공간만 차지하는 애물단지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먼저 로스톨 바닥에 신문지 네댓 장을 공처럼 공글려서 깐다. 그 위에다 삭정이나 잔가지들을 얹는다. 다시 그 위에다 굵은 가지를 얼기설기 채운다.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가는 장작 몇 개비를 우물 정井 자 모양으로 포갠다. 이렇게 해 놓으면 일단 불붙일 준비는 끝이 난다.
라이터를 그어 신문지에 갖다 댄다. 처음엔 종이의 화력으로 화르르 타오른다. 하지만 이것으로 불 피우기가 성공했거니 여기면 오산이다. 그 불은 잔상만 남기고 금세 사라진다. 그와 동시에, 종이가 타면서 생겨난 여열이 마중불이 되어 타닥타닥 불꽃이 일면서 잔가지로 옮겨간다. 이때가 불이 붙을지 꺼질지 판가름 나는 순간이다. 어떨 땐 가물가물하다가 한참 만에 활활 타올라 오는가 하면, 어떨 땐 잘 살아나는가 싶다가도 스르르 눈을 감아버리고 만다. 이처럼 거의 엇비슷한 상황에서도 생사는 극명하게 갈린다.
꺼질락 말락 할 때 새끼손가락 굵기만 한 나뭇가지 하나를 장작 위에다 던져준다. 까무러져 가던 불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다가, 잠시 후 기세 좋게 되살아난다. 따지고 보면 하찮아 보이는 작은 나뭇가지가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셈이다. 벽난로의 불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니, 목숨이 경각에 달린 환자와 마주한 의사의 마음이 아마도 이렇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종이 한 장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던가. 어쩌다 가슴 저미는 사연으로 몸부림치게 될 때, 사람들은 곧잘 이 이야기를 입에 올리며 위로받고 싶어 한다. 생과 사가 한순간에 엇갈리는 일이 세상살이에서 늘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기 때문이어서 일 게다. 벽난로에 불을 지피면서 그 말의 심오한 의미를 돈오頓悟하듯 깨친다.
서른 해가 넘는 세월 동안 대도시 언저리를 맴돌다 연전에 산골로 삶터를 옮겼다. 각다분하고 번잡스러운 그곳 생활이 도무지 생리에 맞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동안 “언젠가는 떠나야지. 언젠가는 떠나야지.” 소리를 노래 부르듯 되뇌어 왔다. 그렇게 내내 마음을 붙이지 못해 겨워하다 마침내 용기를 내어 실행에 옮긴 산골행이다. 그 후 여러 번의 겨울이 다녀갔다. 처음 맞이했을 때는 썩 반갑잖은 손님 같더니, 이제는 많이 낯이 익어졌다.
산골의 추위는 뼛속까지 사무칠 만큼 혹독하다. 특히나 섣달 어름이면, 도시에서 영하 십여 도를 오르내릴 때 산골에선 거기다 적어도 절반 가까이는 더 얹어서 치러야 한다. 말 그대로 추위와의 전쟁이다. 물 좋고 정자까지 좋은 데가 어디 있을까. 그런 강추위는 문밖에 세워 두고 침묵으로 정담을 나눌 수 있는 다정한 벗이 벽난로이다. 이것은 도시인으로선 웬만해서 맛볼 수 없는 산골 생활의 작지만 큰 즐거움이 되어준다. 벽난로 앞에 앉아 너울너울 타오르는 불꽃을 응시하고 있으려니, 어린 시절 할머니한테서 들은 이야기 한 토막이 꽃불이 되어 되살아난다.
지금도 여전히 그 신세를 못 면하고 지내지만, 어릴 적에 나는 유달리 약골이었다. 한번은 세 살 나던 어느 겨울날, 마른김을 삼키다 그만 목구멍에 걸리는 바람에 죽음 문턱까지 간 일이 있었다고 한다. 동네 아낙들이 위로차 찾아와 아이의 상태를 살펴보고는, 하나같이 가망 없으니 단념하라며 달래었다. 어머니는 살릴 희망을 접은 채 강보에 싸서 윗목에 밀쳐 두고는 눈물로 밤을 밝혔다.
절벽 같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용케 생 쪽으로 방향을 틀었던가 보다. 다음 날 어슴새벽에 어디서 주웠는지 할머니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개똥을 구해 와 내게 달여 먹이셨고, 한나절 뒤 나는 온몸이 땀에 흠씬 젖은 채 기적적으로 깨어났다고 했다. 곰곰이 헤아려 보면, 개똥은 사위어 가는 어린 목숨을 살려낸 불쏘시개였던 게다. 그 생명의 은인이 아니었던들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그때 당시의 상황을 그려 보노라니 개똥 앞에 넙죽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어진다.
민요풍의 국민가요로 대중의 사랑을 받는 ‘갑돌이와 갑순이’ 노래에 생각이 미친다. 둘은 서로 애틋하게 연정을 품고 있었으면서도 그들의 사랑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것은 그 사랑에 불을 댕겨 줄 쏘시개가 없었던 탓이다. 사랑이 결실을 거두기 위해선 자신들이 직접 나서거나, 그럴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면 중간에 매파라도 넣었어야 했다. 중매는 잘 하면 술이 석 잔 못 하면 뺨이 석 대라는 말이 있지만, 설사 오지랖 넓게 뺨 석 대를 얻어맞는 한이 있어도 거기엔 아름다운 인연을 맺어 준다는 지중한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을까.
짐을 가득 실은 손수레가 가파른 언덕길을 오른다. 서푼서푼 잘도 굴러가는가 싶더니 마지막 고비에서 가쁜 숨을 몰아쉰다. 끌어올리려는 작용과 끌어내리려는 반작용의 팽팽한 겨루기가 한참 동안 이어진다.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어 보지만 수레는 요지부동이다. 여기서 시간이 더 지체되었다가는 줄줄 뒷걸음질을 치게 될 판이다. 이 임계상황에서 누군가 새끼손가락 하나의 힘만 살짝 보태 주어도 수레는 가뿐히 고개를 넘어설 수 있다.
불꽃이 활활 타오를 때는 아무리 쏘시개를 던져 넣어 봐야 전혀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가물가물 꺼지려고 하는 순간 그것은 최상의 위력을 발휘한다. 때에 따라선 작은 것이 큰 것의 몫을 능가할 수도 있다는 세상사의 이치를 새삼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사람살이에서인들 무엇이 다를 것인가. 자신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잘 헤쳐나가는 이들에게야 조그만 도움의 불쏘시개는 그저 코끼리 비스킷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벼랑 끝으로 몰려 삶의 끈을 놓아버릴 상황에 놓인 사람에게 있어 그것은 목숨에 값할 만큼 절실한 법이다.
“큰돈을 아낌없이 주면서도 때로는 당장의 환심조차 얻지 못하는 수가 있는가 하면, 그리 대단찮은 은혜를 베풀었음에도 상대방이 평생토록 잊지 못하고 고맙게 여기는 수도 있다. 그러기에 남한테 도움의 손길을 내밀 경우에는 때와 처지를 잘 헤아려서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설파한 채근담의 말씀은 불쏘시개의 귀중함을 웅변하는 경구警句가 아닐까.
누구나 성공과 실패 혹은 희망과 절망의 갈림길에서 불쏘시개 역할을 한 나뭇가지 이야기 한두 가지씩은 다들 갖고 살아가리라. 그것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어느 독지가가 대어 준 학비일 수도 있고, 엇길로 빠지려는 제자에게 바른길로 가도록 물꼬를 터준 스승의 가르침일 수도 있다. 삶의 의욕을 잃고 낙담하는 후배한테 “너는 지혜로우니 충분히 이겨낼 거야”라며 추어주는 선배의 한마디 칭찬과 격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가만히 눈을 감고서 지나간 나날들을 되짚어 본다. 오늘 이 순간까지 내 언제 한 번이라도 누군가에게 불쏘시개 구실을 한 적이 있었던가. 노상 자기 삶의 불쏘시개만 얻으려고 안달을 부리면서도, 지금껏 남들의 삶에 불쏘시개가 되어 본 기억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 참 못난 위인이었던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적이 스스러워진다. 이제부터라도 꺼져 가는 생명의 난로에 불쏘시개가 될 수 있도록 세상을 좀 더 진지하게 살아야겠다며 마음 자세를 가다듬는다.
벽난로 앞에 앉아 이런저런 상념으로 골똘하다 보니 시나브로 불기운이 까무러져 있었다. 나무통에서 삭정이 하나를 집어 화구 안으로 던져 넣는다. 잠시 후, 타닥타닥 소리를 내더니 이내 불꽃이 화르르 되살아난다. 심 봉사 개안하듯 어둑서니같이 침침했던 눈이 환하게 밝아 오는 느낌이다. 나른한 기쁨이 몸속으로 퍼진다.
벽난로에 불을 지필 때면, 나는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위급환자를 다루는 의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