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둘 걸 / 이일배
두렁길을 걷다 보니, 쇠뜨기 방동사니 깨풀 괭이밥 개갓냉이 돌나물 등 온갖 풀들이 자욱한 곳에 홀로 우뚝 서서 분홍색 꽃을 뿜어내듯이 피우고 있는 풀꽃 하나가 보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청춘의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끈끈이대나물’이라는 풀꽃이었다. 가늘게 뻗어 올린 꽃가지가 마주 난 잎을 사이에 두고 갈래가 지면서 다시 뻗어 올라 다섯 잎의 아기 새끼손가락 같은 꽃잎을 피워내고 있다.
들꽃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분홍빛이 시리게 고와 눈에 얼른 들 뿐만 아니라, 키도 다른 풀보다 유달리 커 끌리지 않을 수 없다. 저 꽃이 어찌 저 자리에서 피어났을까. 다른 풀보다 높이 솟기도 했지만, 꽃 빛도 주위의 풀들을 압도하고 있다. 풀씨가 하늘을 날다가 자리를 잘못 짚고 떨어져 피어난 꽃인 것 같아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보다 저 꽃의 앞날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그려보면 더욱 안타깝고 아려지기까지 한다. 농부들은 두렁의 풀꽃들을 그냥 두는 법이 없다. 어떤 풀이든 자라 꽃을 피우고 씨를 맺을 만하면 예초기 예리한 칼날로 가차 없이 날려 버린다. 더 가혹한 것은 독한 약을 뿌려 바싹바싹 말라 죽게 하여 다시 잘 나지도 못하게 한다. 풀씨가 농작물에 해를 끼칠까 봐서다.
농부를 탓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꽃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탈 없이 살게 해보리라. 별로 자비로운 품성도 아니면서 이 측은지심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호미를 가져와 흙을 파헤쳐 뿌리째 캐어냈다. 뿌리 박고 있던 흙으로 감싸서 집으로 가져왔다. 화단 한쪽에 자리를 마련하여 곱게 심고 물도 충분히 주었다. 그다음 날도 물을 주며 보듬었다.
며칠 후, 아니나 다를까. 농부는 예초기 소리도 요란하게 두렁의 모든 풀을 처참하게 드러눕혔다. 농부는 후련했을 것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 꽃 옮겨심기를 때맞추어 잘했다 싶었다. 꽃은 며칠 동안 제 빛깔, 제 모습을 잘 유지했다. 아침마다 그 꽃을 문안하듯 들여다보며 물을 주곤 했다. 물도 과하면 해가 될세라 살펴 가며 주었다.
그런데, 웬일일까? 이파리가 조금씩 생기를 잃어 가는가 싶더니 꽃도 빛깔이 바래 가는 듯했다. 영양이 부족해서 그런 걸까? 채소밭에 주는 영양제를 주어도 보았다. 그리해도 나날이 기운을 잃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급기야는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되고 말았다. 잎도 꽃도 완전히 말라 들었다.
‘그냥 둘 걸!’
불현듯 옮겨 심은 것이 아리게 후회스러웠다. 제자리에 있었다면, 예초기의 칼날에 장렬한 최후를 맞이할지언정 사는 순간까지는 제대로 살 수 있었을 것 아닌가. 베어진 다른 풀들과 함께 드러누워 마르다가 거름이 되어서 더 찬란한 꽃을 태어나게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제 살기에 좋은 풍토가 따로 있음을 알지 못하고, 위해준다면서 괜히 옮겨심어 병구病軀로 세상을 떠나게 한 것 같아 아릿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지나친 관심이나 사랑도 독이 된다는 걸 진작에 깨닫지 못했을까.
내 살아온 자취를 돌아보면, 그냥 두어도 좋을 것을 괜한 관심 때문에 부담과 아픔을 끼치게 한 일이 적잖이 있었던 것 같다. 특히 아이들을 키울 때, 그냥 두어도 좋을 소소한 잘못들을 사랑이랍시고 심히 나무라고 심지어는 매질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던 일들이 다시 돌이켜진다. 내 아이들뿐만 아니라, 남의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그런 일을 무던히 했던 것 같다.
내 아이든 남의 아이든 그리한다고 그 사랑과 관심이 속 깊게 새겨져서 살아가는데 생광스러운 보탬이 되었을까. 오히려 상처가 되어 마음에 멍울을 지우지나 않았을까. 그래서 오랜 세월을 두고 아픈 기억으로 남지나 않았을까. 지금은 겪어야 할 세상일들 웬만큼 다 치러내 가며 저마다의 삶을 영위하고 있을 그 아이들에게 민연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다.
그 아이들을 그대로 두었다면 지금보다 더 떨어지게 살고 있을까. 꼭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오히려 마음속에 공연한 반발심이나 혹은 적개심 같은 걸 심어주어 심성 발달을 그르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상상에 잠기다 보니 얼굴이 화끈거리며 홍조가 인다. 얼마나 더 살아야 후회 없는 삶을 살아볼 수 있을까.
화단에 줄기만 겨우 남아 바짝 마른 모습으로 서 있는 저 처연한 모습을 다시 본다. 보기 싫다 하고 쉽사리 뽑아 던져버릴 수 없다. 저것도 속이 있다면, 잘 살고 있던 저를 괜히 뽑아 옮겨 이리 괴로움을 겪게 하는가 하고 여길 것 같아 손길이 떨려온다. 그저 맥없는 상념만 되뇔 뿐이다.
‘그냥 놔둘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