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지 않아도 좋다. 검은 씨앗 하나 품을 땅이면 족하다. 돌벽에 뚫린 물구멍으로도 고개 내밀고 하늘 향해 부지런히 달리고 싶어 하는 열망, 삶의 방향이 불투명한 날에도 휘청거리는 몸짓으로 노래하며 펼치는 나팔꽃을 나는 사랑한다.
그는 어둠 속에서도 태양을 느끼고 대낮에도 다가올 어둠을 감지한다. 어느 꽃 보다 일찍 꽃문을 열고 아침을 맞으며 일찍 꽃 문을 닫는다. 예민하고 섬세한 통찰력은 약자의 생존 욕구로부터 길러졌을 것이며, 그에게 반듯하게 설수 없음은 숙명의 아픔이다. 의존적으로 보이긴 하나, 곧게 선다한들 가늘고 큰 키를 지탱하기는 어려운 일이기에 감당할 만큼의 역할을 허락하신 창조주의 섭리, 어찌 보면 자유분방한 유연성의 개성을 주는 동시에 홀로 설 수 없는 아픔을 동반시켰는지도 모른다.
미지의 세계에 대해 호기심이 많아 몇 바람의 실을 타고 오르기도 하고 가시철망이나 전깃줄에도 겁 없이 감는다. 네 집, 내 집의 개념이 없이 넘나든다. 열리는 대로 뻗어가다가 큰 장애물을 넘어가는 지혜는 있어도 강압적인 힘 앞에서는 뚫을 힘이 없다. 그는 자유를 제1의 소망으로 삼는다. 억압의 대응책이다.
자신을 닫았을 때와 열었을 때의 대조적인 모습- 원추형의 갸름한 꽃봉오리는 나선형으로 야무지게 꼬아 다물고 때가 되면 전폭적으로 열어 보이는 개방성, 한번 열면 있는 대로 속내를 보여주는, 아무리 봐도 내숭과는 거리가 먼 꽃이다. 자신을 감추고 종자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아무리 봐도 무거운 색의 악기와는 거리가 멀다. 음이 높고 명쾌한 트럼펫과 어울린다. 재즈 같은 경음악을 연주해도 좋다. 외침의 소명으로, 영감을 받아 연주하는 '하늘 연가'는 마음이 열린 사람의 귀에만 들린다. 지나치게 감성이 여린 꽃잎은 옷깃만 스쳐도 상처가 나고 손으로 만지기만 해도 잎이 치인다. 그래도 피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막무가내로 피는 열정 어린 생산성, 어느 꽃이 가늘고 길게 뻗어나가는 나팔꽃의 자기 확대 욕구를 막을 수 있을까.
꽃이 크면 송이 수가 작고, 크기가 작으면 대개 무리 지어 피는데 1년초인 나팔꽃은 타래를 짓지 않고 무수한 꽃송이를 피워낸다. 다산과 조산은 잃어버린 꽃에 대한 예비이리라. 그들은 거름이 없어도 투정할 줄 모르고 감을 대상이 없어도 실망하지 않는다. 출렁거리는 몸짓으로 허우적거리다가 찾지 못하면 제 줄기를 서로 감으며 하늘을 향하는 열성파다.
줄기의 가슴둘레를 재자면 꽃밭의 꼴찌를 면하지 못할 것이며 키 재기를 하자면 자를 대기가 민망할 것이다. 사람에게 상처를 받으면서도 사람 가까이에 피는 그는 어린이들의 소꿉놀이 밥상에서 꽃봉오리가 솜씨 좋은 음식이 되기도 하고, 아이들의 나팔이 되기도 한다.
비바람이라도 치는 날이면 감은 줄까지 흔들려 존재의 위기를 맞는다. 모진 바람과 굵은 빗줄기는 나팔꽃에게 불어닥치는 최대의 시련이다. 그래도 그는 하늘을 배신하지 않는다. 해만 들면 기지개를 켜며 꽃봉오리를 맺는다.
이들은 뭇사람의 호들갑스런 찬사를 받는 일은 드물며 어쩌다가 시인의 눈에 띄면 시제가 되고 문인화가의 손끝에서 화선지에 꽃을 피운다. 자신을 잘 알기에 과분한 시선을 바라지 않으나, 무관심에 초연할 수가 없다. 사람 가까이 있어야 할 운명의 잡초이다.
이들의 씨 맺기는 키 작은 채송화와 같이 도금된 마호멧 성전과 같은 돔을 짓고 씨앗을 품는다. 한 철을 같이 지낸 난쟁이와 키다리의 우정이다. 손가락을 손바닥에 수직으로 세운 형상으로 후손을 위한 자상한 조력을 보여주는 나팔꽃의 꽃받침은 씨가 익을 때까지 사랑의 방패가 된다. 부모의 보호를 많이 받고 태어나는 이들의 씨앗은 인격의 칸막이가 있는 각 방에서 고유성을 보장받고 옹골지게 사과 쪽 같은 씨앗을 익히며 종족보존의 의무를 다한다.
씨앗이 익을 때쯤이면 창을 가리던 '그늘 짓기'의 몫은 끝난다. 시든 잎에 미련을 두지 않을 만큼 햇빛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여름내 부지런함으로 칭송되다가 성급함으로 매도되기도 하던 나팔꽃의 한살이가 끝나면 뜰 밖에선 운동회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나팔꽃은 헤아려 주지 않는 마음에 미련을 끊고 물 올리기를 그친다. 끝내 겸손하지 못하게 피는 것 같아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려 해도 단 한번도 그렇게 피어 보지 못한 세월에 대한 회한도 놓고 갈 시점에 이른다.
누가 봐도 나팔꽃은 내성적인 꽃은 아니다. 생명의 표출력이 강한 꽃이다. 여린 심성 탓으로 남에게 상처 주지 못하고 끙끙 앓다가도 길만 열리면 일사천리로 달린다. 무성한 잎이 가는 줄기를 가리워 강인한 꽃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생존의 방편으로 돌아갈 줄도 알고 쉬어갈 줄도 안다. 그는 키 크고 대범한 해바라기를 부러워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목련이나 소나무 같은 기품 앞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타고난 팔자처럼 그러려니 한다. 결코 자신의 몫이 훌륭하지 못하다고 좌절하지도 않는다.
나는 나팔꽃을 초등학교 입학하면서 산수 책과 미술시간에 이름을 알고 만났다. 네모 칸 속에서 한 송이 두 송이가 그려졌고 그 곁에 수 개념을 익히기 위해 아라비아 숫자가 쓰여있었다. 미술 시간의 색칠하기 종이에서 우리는 분방함에 대한 견제의 대안처럼 통제를 먼저 배웠다.
꽃을 보고 마음껏 느낌을 표현해 보라는 예술적 감각을 키우는 교육은 어디에도 없었다. 색칠도 제대로 되지 않는 크레온으로 선 밖으로 나가지 않게 색칠하는 것부터 익혀야 했다. 감정 가두기와 소심함으로 교육은 틀에 가두기부터 시작되었다. 학교가 그럴 때 가정도 예외일 수 없었다. 억압과 통제가 젊음의 문전에서 삶의 걸림돌이 된다고 느꼈을 때 나는 내 5동생들의 자유를 위해 헌신적으로 문 역할을 했으며 막내 동생은 나팔꽃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지금도 방송계에서 열심히 꽃을 피운다. 새벽 6시면 방송으로 아침 인사를 하며 국제화 시대에 영어교육에 1익을 담당한 지 몇 해인가. 활동을 시작한 화산은 눈비가 내려도 마그마를 뿜고 여름이 되면 나팔꽃처럼 줄기차게 꽃을 피우며 동생은 방송을 쉬지 않는다. 나는 4계절 중, 여름에 가장 얼굴을 반짝이며 활동한다. 지금은 상황의 겨울, 씨앗으로 마음의 봄을 기다린다.
지난겨울, 데리세가 나의 꽃을 나팔꽃이라 정해주며 잘 가꾸어 덩굴진 나팔꽃을 찍어 시와 함께 보내 주었다. 잊었던 추억과의 정겨운 해후, 진한 꽃빛으로 도시의 화단에 발색하며 꽃밭을 야단스럽게 장식하던 수입 꽃을 밀어내고 다시 자리잡은 그 나팔꽃이 보고 싶어 외출하며 나팔꽃이 있는 길을 택했다. 버려진 옹기가 옛정으로 동무하고 있었다.
세상이 철조망 같아도 옹기 같은 친구를 곁에 두고 옛정으로 피는 나팔꽃은 노래한다.
해를 안고 익은 사랑,
때가 되면 추억도 버리고 떠날 나는
한 송이 나팔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하늘 뜻 담아 세상을 향해 노래 부르는 것이 소망인 내게 피었다 지는 것이 속절없다 하여도 내가 부른 노래를 내가 들으며 검은 씨앗에 나의 역사를 담고 익어 가리라. 한 톨 한 톨 나팔꽃씨로...
내가 좋아하는 나팔꽃이 잡초로 분류된다 해도 나팔꽃이 꽃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잘 가꾸어진 정원도 좋지만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잡초밭에 서면 숨통이 열리고 작게 피는 그들의 향내와 자태를 접하려면 가까이 다가들어야 하기에 친밀감을 느낀다. 내가 쓰는 수필을 잡문이라고 해서 누가 문학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척박하게 삭막한 세상에 지키지 못할 만큼 큰 결단력은 아니어도 사람이 사는 길을 내고, 죽음으로 인류를 놀라게 하는 성녀의 사랑이 아니라도 정을 무쳐 내는 수필을 잡문이라 함은 다양함의 수용적 이름이리라.
내가 좋아하는 나팔꽃만큼 내가 쓰는 수필이 사랑받기를 바란다면 지나친 소망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