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에서만 냄새가 나는 건 아니다. 느낌에서도 냄새가 난다. '사람 냄새가 난다'는 말은 그 사람의 체취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의 따뜻한 정과 순후한 인품을 느낌으로 말할 때 가끔씩 냄새를 차용해 온다. 나는 맘에 드는 절집에 가면 달빛 냄새가 나는 듯한 아름다운 생각을 하게 된다. 절이라고 모두 그런 건 아니다. 인간 세상에서 좀 멀리 떨어져 낡은 토기와 사이에 와송과 청이끼가 자라고 있는 고졸미가 흐르는 그런 암자에 가면 달빛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지난 주말 토요산방 도반들과 경주 남산의 칠불암에 올랐다. 그곳은 묘하게도 갈 적마다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마력이 있어 오래 머물고 싶어진다. 그 까닭을 곰곰 생각해 보니 사방불과 삼존불 등 일곱 부처님이 갖고 있는 각기 다른 도력道力이 한곳으로 뭉쳐져 신도가 아닌 사람에게까지 '아! 참 좋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 같다.
칠불암의 일곱 부처님의 모습은 한결같이 온화하고 자애롭다.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온갖 풍상을 겪었지만 아이 갖기를 소원하는 아녀자들에 의해 콧등만 베어 먹혔을 뿐 얼굴 모양은 아직도 멀쩡하다. 원래는 보물 200호였으나 연전에 국보 312호로 승격했다.
칠불암에서 오른쪽 가파른 암벽을 타고 올라가면 또 하나의 숨은 보물이 수줍은 미소를 띠고 참배객을 맞는다. 보물 199호인 신선암 마애보살상이다. 이 보살상은 칠불암 위에 직벽으로 서있는 남쪽 바위에 새겨져 있다.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면 비좁을 정도의 절벽 길을 20m 정도 걸어 들어가야 한다.
국보인 칠불암은 암자의 마당에 나앉아 있고 보물인 마애보살상은 찾아오기 힘들 정도의 벼랑 끝에 숨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사방불이나 삼존불 보다 마애보살상이 더 마음에 끌린다. 아마 칠불암에서 느끼는 달빛 냄새도 이 보살상이 입고 있는 얇고 보드라운 실크 이미지의 천의天衣가 바람에 일렁거리면서 바람기 많은 달빛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리라.
칠불암은 최근 몇 년 만에 모습이 크게 바뀌었다. 겉모양뿐 아니라 내실까지 다져져 누가 봐도 내공이 단단함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건 부처님의 자비 공덕이기도 하지만 인연의 끈 따라 흘러온 신임 비구니 암주인 예진스님의 열정어린 노력 덕분이 아닌가 싶다.
스님은 무너져가는 요사채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관한 관청을 찾아다니며 남산의 사랑방 격인 칠불암의 복원을 애원하고 다녔다. 그 뜻이 마침내 이뤄져 문화재청과 경주시의 지원으로 헬리콥터 수송비만 1억 5천만 원이 소요되는 불사를 거뜬하게 이뤄낸 것이다.
남북으로 앉은 정면 삼 칸 측면 한 칸짜리 요사채는 북쪽 문만 열면 사방불과 삼존불 등 일곱 부처님이 훤히 보이는 적멸보궁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또 문을 닫아걸면 법당으로 바뀌어 염불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지고 공양시간이 되면 밥상 위에 숟가락 놓는 소리가 목구멍으로 침 넘어가는 소리보다 오히려 작게 들린다.
이곳 칠불암은 물이 귀한 곳이어서 특히 겨울철에는 식수가 모자라 애를 먹는다. 그래도 스님을 비롯한 자원봉사자들이 항상 밥을 많이 해두고 손님들에게 "공양하고 가세요."하고 푸근하게 베풀고 있다. 요즘은 이곳에서 고양 신세를 진 청장년층에서 템플 스테이를 요청하는 경우가 많아 절문은 항상 열려 있다.
칠불암은 경우 남산중에서도 기가 한곳으로 모이는 곳으로 소문이 나 있다. 우선 동해 대왕암 쪽에서 떠오른 아침 해가 토함산을 넘어 남산고위봉의 칠불암을 비춘다. 밤이 되면 맞은편 능선에서 솟아 오른 달빛이 별빛을 섞어 신선암의 마애보살상을 비추면 부드러운 미소가 달빛 냄새로 둔갑하여 계곡 아래로 번져 나간다.
동트기 전 신선암 마애보살상 앞에 기다리고 있으면 햇빛의 각도에 따라 보살상의 모습은 시시각각 변한다. 흔히 '백제의 미소'로 알려지는 서산마애삼존불의 모습처럼 여러 형상으로 바뀌다가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과 꽃을 든 오른손이 금색으로 변하는 것을 끝으로 꿈에서 깨어난다.
예진스님이 차려준 점심공양 상에 소쿠리 가득한 상추쌈은 정말 풍성했고 날된장 맛은 기가 막힐 만큼 좋았다. 음력 칠월 백중 지나고 한 사흘 뒤 달이 뜰 무렵 신선암에 올라 달빛이 떳을 때의 그 달빛 냄새를 코를 킁킁거리며 맡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