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용사와 부사를 생각함 / 김훈

 

나는 인쇄된 나의 글을 읽지 않는다. 돌이켜 보면 한 생애가 강물 같이 흐름을 이루지 못하고, 파편으로 부스러져 있다. 삶을 구겨 버리는 그 무질서가 아무리 진지하고 순수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하려는 과장된 어조와 단정적 서술을, 이제 견디기 어렵다. 책값을 내고 이걸 사서 읽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식은땀이 난다. 이 자학적 수치심은 오래된 고질병인데, 증세는 악화 중이다.

사유의 바탕이 성립되지 않거나 골조가 허술하거나 전개가 무리하거나 애초부터 쓸 필요가 없는 것들을 매문賣文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형용사나 부사 같은 허접한 것들이 문장 속에 끼어들어서 걸리적거리는 꼴들이 역겹고, 그런 허깨비에 의지해서 몽롱한 것들을 표현하려 했던 나 자신이 남사스럽다. 글 쓰는 자가 문장을 놓아먹이면 글이 웃자라서 허해지고 이 틈새로 형용사나 부사가 끼어들어서 그 허당을 차지한다. 써나갈수록 이 허당은 더욱 헤벌어진다.

동양 고대의 대가들은 문장의 고삐를 힘주어 당기지 않아도 될 말을 부릴 수 있었는데, 이것은 흉내 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말이 저절로 사람을 따라올 리는 없으므로 그 대가들도 힘들인 흔적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고삐를 바짝 쥐기는 했을 터이다.

쓰이기를 원하는 것들과 남에게 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속에서 부글거리는 날에는 더욱 문장의 고삐를 단단히 틀어쥐어야 한다. 이런 날에는 형용사와 부사가 끼어들고, 등장인물의 말투가 들뜨고 단정적 종결어미가 글 쓰는 자를 제압하려고 덤벼든다. 글이 잘 나가서 원고 매수가 늘어나고 원고료가 많아지는 날이 위험하다. 이런 날 하루의 일을 마치고 공원에 놀러 나가기 전에 글 속에서 뜬 말을 골라내고 기름기를 걷어 낼 때에는 남이 볼까 무섭다.

요즘에는 이리저리 주무르다가 버리는 말들이 늘어난다. 이런 말들 중에는 거대한 관념어도 있고, 큰 것을 도모했다가 헛발질한 문장도 있지만, 형용사나 부사가 가장 많다. 내버린 단어들을 다시 주어서 쓰기도 하고 오래 망설이다가 다시 끼워 넣기도 한다. 이런 파행은 오래된 것이지만 나이 들면서 더 심해진다.

사물이나 현상은 수식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와 사소한 관련도 없다. 겨울은 춥지 않고, 여름은 덥지 않다. 꽃은 아름답지 않고 똥은 더럽지 않다.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은 인간의 언어일 뿐이다. 형용사와 부사는 그 단어가 수식하려는 대상을 표현하지 않고, 그 대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주관적 정서나 감각과 선입관을 표현한다.

형용사가 문장의 술어가 아니라 수식어로 사용되었을 때 사물과 언어 간의 괴리는 더욱 두드러진다. ‘오늘은 춥다’라고 말하면 추움은 어느 정도 객관화되지만, ‘추운 오늘’이라고 말하면 ‘추움’은 말하는 자의 감각 세계를 드러낼 뿐이고, ‘추위’라고 말하면 양쪽 모두를 추상화해서 개념의 세계로 넘어간다.

형용사나 부사는 그 단어의 힘이 미치는 범위가 분명하지 않고 문장의 논리적 기능에 기여하는 바가 없어서 사물이나 사유를 의탁하기에는 허약한 품사라는 의구심을 나는 버리지 못한다. 형용사나 부사를 타박하면서 문장에서 쫓아내는 것은 그 단어를 부리는 솜씨가 모자라서 제자리에 들여앉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것을 모르지 않지만, 나의 글은 여전히 너무 수다스럽다. 나는 내 선인들의 좋은 글을 보이면서 나의 오류를 증명하려 한다.

 

이제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이육사, ‘광야’ 중에서

 

*국어사전에 따르면 ‘여기’는 대명사지만 이 시에서는 부사적 용법으로 쓰였다.

 

이육사李陸史(1904~1944)는 이 시행에서 ‘이제’, ‘홀로’, ‘여기’라는 부사 3개를 쓰고 있다. 시행 한 줄에 부사가 하나씩 박혀 있다. 이 부사 3개가 시행에 출렁이는 리듬을 부여해서 흐름을 끌고 나간다. 언어의 흐름과 내면의 흐름이 합쳐져서 이 출렁거림은 강력한 돌파력을 갖는다. 부사 3개가 인간의 존재를 약육강식하는 세계의 비극 앞으로 돌이킬 수 없이 바짝 밀어붙인다. 이 문장은 지금, 여기에 처한 실존의 모습이다.

이 외로움은 고독이라기보다는 단독이다. 이 부사 3개에 힘입어, 시인은 세계의 비극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여서 아득한 미래를 향해 운명을 전화시키고 시와 자신의 생애를 역사의 전위로 밀어붙인다. 이 부사들은 웅장하고 강력하다. 이것은 혁명가의 부사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스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백석, ‘국수’ 중에서

 

백석白石(1912~1996)의 시에 자주 나오는 ‘국수’는 냉면이다. 백석은 형용사 4개를 잇대가면서 냉면의 모양새와 질감을 표현하고 있다. 구태여 분류하자면, ‘슴슴하다’와 ‘부드럽다’는 말은 냉면을 먹는 백석 자신의 식감이고 ‘히스무레’와 ‘수수하다’는 말은 냉면 자체의 시각적 느낌이다. ‘슴슴하다’는 혀의 미각이고 ‘부드럽다’는 입안의 촉각이다. ‘히스무레하다’는 색감이고 ‘수수하다’는 형태다.

4개의 형용사 안에서 인간(백석)과 사물(국수)은 서로 교차하면서 합쳐진다. 인간이 사물을 형용하고 사물이 거꾸로 인간을 형용한다. 이렇게 해서 형용사들은 ‘국수’ 안에서 서로 스미고 섞인다. 기능이 강화된 형용사들은 냉면을 먹는 시인의 자아를 산골 마을의 공동체적 생활과 집단 정서 속으로 확장시킨다.

이 두 줄의 시행 속에서 백석의 형용사 4개는 ‘국수’라는 사물을 꾸미는 수식어라기보다는 4개가 합쳐져서 한 마당의 세상을 이룬다.

 

졸레졸레 도야지새끼들이 간다

귀밑이 재릿재릿하니 볕이 담복 따사로운 거리다

아 모도들 따사로이 가난하니

-백석, ‘삼천포’ 중에서

 

대체로 백석의 문장은 서술문으로서의 구조가 튼튼하면서도 복층을 이룬 구문 위에 감각적 표현의 세계를 이룬다. 나는 이 논리적 구조와 감각적 세계의 상호보완 관계 속에서 백석의 가장 중요한 대목들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아름답다-아름답게’처럼 형용사는 부사어로 쉽게 전용할 수도 있지만, 인용한 시행에서 ‘재릿재릿하니’나 ‘따사로이’의 쓰임새는 형용사와 부사 양쪽 모두에 걸치면서 표현하려는 대상을 인간의 감각 속으로 끌어들인다.

‘귀밑이 재릿재릿하니’는 햇볕을 받는 돼지의 느낌이고, 돼지 귀밑에 내리는 햇볕의 모양새이고, 그것을 들여다보는 인간의 느낌이다. 이렇게 해서 이 시 전체는 산문적 종결 없이, 형용사의 세계로 열려 있다.

 

자유, 평등, 해탈, 초월 같은 개념어들이 지향하는 궁극의 상태는 형용사적 세계일 것이다. ‘가난함’을 ‘빈곤’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가난을 모른다.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겪는 삶은 빈곤poverty이 아니라 가난함being poor이고 차별받는 사람이 원하는 세상은 평등equality이 아니라 평등함being equal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해탈한 도인들의 자유는 동사나 명사의 세계가 아니라 중생들은 알 수 없는 어떤 형용사적 세계일 것이다.

옛글에 나오는 동양 고승들의 난해한 돌출 행동은 그가 마침내, 혹은 갑자기 도달한 어떤 형용사적 세계의 비언어적 표현이다. 형용사적 세계를 서술문의 형태 안에 들여앉히려는 노력은 오래 거듭되는 중생고이다.

삶의 한복판에 있는 자들만이 말을 온전히 부릴 수 있는데, 그 자리에 있는 자는 말을 부릴 일이 없을 터이니 말하기는 어렵다. 본래 그러한 것을 입을 벌려서 “그러하다‘고 말할 때 나는 말 앞에서 당혹스럽다. 형용사를 탓할 일이 아니라, 자신의 말이 삶에 닿아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삶을 향해서, 시대와 사물을 향해서, 멀리 빙빙 돌아가지 말고 바로 달려들자. 이육사, 이용악李庸岳(1914~1971), 백석, 김수영金洙暎 (1921~1968) 등을 읽고 나서 이 글을 썼다. 나는 빈곤이 아니라 가난함을 써야 한다. 형용사와 부사를 버리고, 버린 것을 다시 추려서 거느리고 나는 직진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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