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나무들에 대한 예의 / 곽흥렬 

 

오일장이 서는 날이다. 요즈음 들어 장날이면 재래시장 구경하는 재미에 푹 빠져 지낸다. 오늘도 다음 장도막까지 쓸 거리를 사고 바람도 쐴 겸 산책 삼아 읍내 나들이에 나섰다.

조붓한 주택가를 돌아서 장판으로 막 들어서려던 참이었다. 맞은편에서 삼십 대 후반 아니면 사십 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두 여인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걸어오고 있다. 그 가운데 한 여인인 길가에 면한 집 마당의 매화를 보고는 자지러지듯 감탄사를 쏟아낸다.

"하이고야! 벌써 꽃이 피었네. 벚꽃인가?"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여인이 "어데? 어데?" 하며 꽃나무 쪽으로 눈길을 보낸다.

"아이다. 살구꽃이다. 아니 복사꽃 같기도 한데​…"라고 깔깔거리며 지나쳐 간다

2월 하순, 아직은 겨울의 끝자락이니 벚꽃이 피었을 리라 만무하다. 살구꽃이야 그렇다 쳐도 벚꽃이 개화하려면 짧아도 한다, 게다가 복사꽃을 보려면 또 그러부터 한 열흘 가량을 더 기다려야 한다.

평소 꽃나무들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하고 무신경하게 살아왔으면 2월에 핀 매화를 보고 4월 꽃인 벚꽃이니 살구꽃이니 하는 소리를 꺼내고 있을까. 매화가 속으로 "으이구. 이 한심한 여편네들아.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도 유분수지." 하고 나무랄지도 모를 일이다. ​나 역시 매화하고 똑같은 마음이 되어 혀가 끌끌 차인다. 두 여인의 대화를 가만히 곱씹고 있으려니 나의 이야기로 생각이 옮겨간다.

내 이름은 일어날 흥興자 매울 렬烈​ 자를 써서 '흥렬'이다. 그런데 지인이나 사회활동 관계로 만나는 사람 중에 가운데 글자인 '흥'을 '홍'으로 읽어 '홍렬'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심심찮게 있다. 한글로 표기해 놓았을 때 얼핏 보면 일쑤 '흥'과 '홍'이 헷갈리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하여 한글세대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지금 세상에서 늘 한자로 적어 둘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일어날 흥 자를 아예 읽어내지 못하는 부류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고전소설 「흥부전」에서의 흥부를 보거나 우리 민족의 애창 가곡인 <바위고개>의 작곡가 이흥렬 선생하며 한국의 피카소로 불렸던 김흥수 화백 등등의 경우만 보더라도 사람 이름에 '흥' 자가 '홍' 자에 비해 그다지 적게 쓰이진 않는 성싶은데, 그들은 왜 주의 깊게 살피지 않고 흥을 홍으로 읽어버리는지 아무리 헤아려 보아도 그 연유를 모르겠다.

어쨌든 매화를 두고서 벚꽃이니 살구꽃이니, 심지어 복사꽃으로까지 이야기하는 예의 그 여인들처럼 남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불러대는 것 같아 기분이 썩 개운치가 못하다.

이름을 부르더라도 좀 제대로 불러야 할 것이다. 멀쩡한 자기 이름을 놔두고 엉뚱한 이름으로 호칭한다면 어느 누구인들 좋은 마음이 들 리가 있겠는가.

꽃나무들의 이름을 처음부터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세심히 살피면 그들의 앞가슴에 달린 무형의 명찰이 눈에 들어오게 되어 있다. 그러기에 이름을 정확히 안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예정의 다른 표현 일지다.

어디 꼭 꽃나무뿐이랴. 무엇이든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고, 또한 관심과 사랑으로 대하면 그 대상이 스스로 말을 걸어오게 되어 있다고 하지 않던가. 매일같이 주머니에 들어올 돈이나 헤아리고, 오늘은 뭐 맛있는 거 해 먹을까 내일은 어디 가서 무엇으로 재미나게 놀까 그런 궁리만 할 줄 알았지 공원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 관심을 둘 줄은 모르는 지극히 속물주의적인 삶을 되풀이해 온 결과는 아닐는지…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세상사에서 비록 세세하게 많이는 모른다 할지라도,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꽃나무들만이라도 관심을 갖고 이름을 익혀 두었으면 한다. 그것이 항싱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로 향기를 선사하는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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