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연필을 깎고 싶을 때가 있다 / 황정희
연필을 깎는다
사각이며 깎여 나가는 소리가
한 사람이 멀리서 뛰어오는 발걸음 소리 같다
저문 안부가
보낼 때마다 하루를 긁적이게 하는 노을의 붉은 빛처럼 수북해져
연필이 깎여 나갈수록
내 생활의 변명처럼 흩어진 나를 그러모아
쓴다
백지 위에
수많은 말풍선들
두더지게임 하듯 여기저기 불쑥불쑥 튀어 오르다 사라지는 말들
꽃피고 계절 지는 동안
사람피고 인연 지는 동안
언제부턴가
허리를 굽힌 시간을 바로 눕히고
절름발이 그리움도 그리움이라고 칼끝에 닿는 연필심에
맥박이 뛴다
안부는 묻는 것이 아니라
먼저 들려주는 거라고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