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에 꽃을 두고 왔다
모래사장에 짐을 내려놓고서야 생각났다
매리골드는 처음이잖아
이러니까 그리운 게 나쁜 감정 같네
누굴 주려던 건 아니지만
두고 온 꽃을 가지러 갈까?
이미 늦은 일이야
그냥 평생 그리워하자
꽃을 두고 왔어
내가 말했을 때

우리 중 평론가만이 그걸 가지러 갔다
(중략)
이제 그만 돌아와
내가 잘못했어
뭍은 뭍으로 걸어가 언덕이 되고
평론가가 온다

저 꽃은 내가 두고 온 것이 맞다


―이소연(1983∼ )

 

이 시를 읽었을 때, 하마터면 일어날 뻔했다. “화장실에 꽃을 두고 왔어!” 이런 소리를 들으면 재깍 일어나는 편이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내 몸은 왜 반응했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의 가설이 있다. 우선, 시에서 ‘평론가’만 일어났기 때문이다. 시를 읽으며 나는 평론가라는 자의식을 발동시키고 있었나 보다. 누가 나를 불러서 일을 시키는 줄 알았다. 다음으로, 꽃을 두고 온 사람이 시인이기 때문이다. 꽃을 두고 왔을 때 시인은 ‘그걸 꼭 가지고 와야 할까. 이건 시적인 사건이야. 그냥 그리워하자’는 소리를 충분히 할 수 있다. 나의 시인 아버지도 늘 이런 식이었다. 그럴 때는 곁에 있는 사람이 일어나게 된다. 그냥, 자동으로 일어나는 것이 습관이 된다. 시인의 친구나 가족들에게 이것은 ‘사랑의 습관’이다.

 

 일상이 일상으로 그치지 않았음에 이 시인의 위트와 재능을 엿보게 된다. ‘내가 잘못했으니 이제 돌아와’라는 말에 ‘뭍이 뭍으로 걸어가 언덕이 되었다’는 말이 겹치니 한 사건이 인생이 된다. 평론가가 꽃을 들고, 꽃처럼, 꽃이 되어 돌아왔다는 구절에서는 웃는다. 시인의 말이 맞다. 필요한 건 사랑의 말, 그뿐.

 

나민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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