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물줄기 / 이래춘
내 인생을 깊이 생각하고 싶었다. 한적한 곳을 찾아 태백으로 떠났다. 짧은 발걸음 끝에 삶을 꿰뚫어 보는 혜안이 갑자기 생길리야 없겠지만 오롯이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삼십 년 동안 가전회사를 다녔다. 주로 영업 관련 일을 했다. 운이 좋아 때를 놓치지 않고 승진했다. 자회사로 이동하면서 오랜 꿈이었던 중역이 되었다. 사무실 입구에 내 이름 석 자가 새겨진 팻말이 걸려 있었다. 출퇴근을 할 때마다 팻말을 슬쩍 보면 가슴이 뿌듯했다. 내 인생에서 제일 빛나는 시절이었다.
'빛나는 시절'을 보내려면 그에 상응하는 성과를 내야 했다. 실적에 따라 희비가 교차했다. 외줄을 타듯 아슬아슬했다. 사원은 종이 칼로, 관리자는 나무칼로, 임원은 진짜 칼로 싸운다. 싸움에 지더라도 사원과 관리자는 상처가 크지 않지만 임원은 치명적인 상처인 해고를 당할 수 있다. 바로 실업자가 된다. 오죽하면 임원을 임시 직원이라고 하겠나.
회의와 회식도 잦았다. 밤늦은 귀갓길 오늘 하루도 견뎌냈다는 안도의 한숨이 나오곤 했다. 흔들리는 배에서 멀미 인생을 살았다. 그런데도 가족이 걱정할까 봐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건강에 빨간 불이 연속해서 켜졌다. 새로운 출발을 하기로 결심했다. 퇴직을 하니 뾰족한 바늘로 머리를 콕콕 찌르는 듯한 통증이 제일 먼저 사라졌다.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렸다.
어떻게 하면 여유롭고 편안한 마음으로 살 수 있을까. 삶의 방향을 어디로 정할지 고민하다 찾은 곳이 태백이었다. 먼저 삼수령(三水嶺)에 갔다. 이 고개에 떨어진 빗물이 흘러가는 방향에 따라, 북쪽이면 한강을 따라 서해로 가고, 남쪽이면 낙동강을 따라 남해로, 동쪽이면 오십천을 따라 동해로 간다.
삼수령 고개 위에 정자가 보였다. 고즈넉한 정자에 앉아 고개를 내려다보았다. 내 삶의 빗물은 어느 강으로 흘러들었을까. 가족과 회사는 내 인생의 두 갈래 큰 물줄기였다. 세 번째 물줄기를 그려 보았다. "생계를 유지하는 것과 삶을 살아가는 것은 같지 않다"고 하듯 세 번째 물줄기는 생계가 아닌 나의 삶으로 채우고 싶었다.
삼수령에서 매봉산을 넘으면 검룡소가 나온다. 검룡소는 한강의 발원지이다. 하루 이천 톤의 물이 솟아난다. 샘물은 천리가 넘는 물길을 따라 흐르다가 큰 강이 되고 마침내 서해에 닿는다. 천리 물길을 아무나 흐를 수 있을까. 비가 와도 눈바람 속에서도 쉼 없이 흐른다. 때로는 곧게 때로는 좌우로 굽이치면서 흐른다. 강물처럼 부드럽고 강물처럼 꺾이지 않는 삶을 살고 싶었다. 긴 여정 끝에 바다에 이르면 나는 어떤 모습일까 자못 궁금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추전역이 눈에 띄었다. 추전역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철도역이다. 한때는 석탄을 실은 열차가 바삐 오갔던 곳이다. 높이와 속도는 회사 생활에서 큰 덕목이었다. 앞으로는 깊이와 여유가 더 소중하다. 더 이상 오를 곳도 없다. 내면 깊숙이 숨어 있는 진정한 나를 찾고, 강물처럼 유유히 흐르고 싶었다.
태백산 입구에 숙소를 잡았다. 지나가는 산바람에 방문이 덜컹거렸다. 곁에 있어줄 누군가가 그리웠다. 어릴 적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는 밥보다 술을 즐겼다. 핍박한 삶을 술로 달랬던 것일까. 살아 계시다면 술잔을 올리며 여쭤보고 싶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창문을 열었다. 밤하늘에 꽃처럼 화려하게 핀 별들이 보였다. 함께 별을 보던 고향 친구들이 생각났다. 고등학교 때 친구 몇 명과 문집을 만들었다. 우리는 유명 작가가 된 양 서툰 글이지만 열심히 썼다. 문집에 실린 글을 학교 문예제에 출품하기도 했다. 갑자기 문학의 물길을 잇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묵정밭이 된 마음을 비옥하게 가꾸어 글꽃을 피우고 싶다는 소망이 가슴을 채웠다.
태백에서 돌아와 글쓰기 교실에 등록했다. 글은 연필만 새로 깎는다고 술술 쓰이지 않았다. 글을 써야 하는데 글자만 썼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의 마음으로 쓰고 또 썼다. 운 좋게 몇 년 후 수필 공원을 거닐 수 있는 입장권을 얻었다. 내 인생 세 번째 물길이 시작되었다.
아침이면 나름대로 성장(盛粧)을 한다. 연한 향의 향수까지 뿌리고 집을 나선다. 발걸음이 가볍다. 카페 앱으로 미리 주문한 커피를 받아서 이층에 올라 숲이 보이는 창가에 앉는다. 헌팅캡을 쓴 채 이어폰으로 명상음악을 듣는다. 눈을 감고 나를 찾아 깊이 침잠해 들어간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서너 시간 글을 쓴다. 행여 빛나는 문장이라도 떠오르면, 그게 나만의 생각일지라도 세상 다 가진 듯 발걸음이 더욱 가볍다.
지금은 문단에 이름을 겨우 올린 검불 같은 신세다. 벌겋게 달아오른 장작불이 어둠을 사르듯 언젠가 내 글도 잉걸처럼 빛나는 날이 오길 기다린다. 아니 어둠을 이기지 못하는 잔별이 되어도 괜찮다. 그저 내 맘에 아담한 둥우리 하나 마련해서 따스한 글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