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 고유진
복제품은 앤디 워홀 작품의 보증서까지 치밀하게 제작했다. 미스치프가 이렇게 대담하게 베껴도 작품으로서 가치를 지니는 건, 그 속에 담긴 의미가 선득하도록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원작을 구별하기 힘들어진 세태의 반영과 기발함이 빛을 발하므로 불편해도 마주해야 한다. 아이러니하지만 대량생산하는 작가들이 높은 수익을 창출하는 시대에 지켜내야 할 명분과 가치에 혼란이 생기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단 한 점의 예술 작품과 999점의 완벽한 복제품을 합친 1,000점의 에디션을 판매했다면 믿겠는가. 못 믿을 건 또 뭐란 말인가. 문화와 상술이 만나 시너지가 된다면. 질펀한 정보의 늪에서 진짜를 분별할 능력이 과연 얼마큼이나 있을까. 어지럽다. 노트북을 열어놓고, 티브이를 틀고, 문자 확인하는 일을 동시에 하는 멀티태스킹에 익숙한 현대인. 나의 하루만 봐도 먼지를 훔치다 생각하고, 계획을 짜다 식물에 물을 주기도 하는, 지독히도 어수선한 어른 ADHD라도 되는 듯…. 너무나 많은 데이터에 물리고 질려 가래떡 마냥 뽑아낼 생각의 정리가 수시로 필요하다.
주문한 적 없는 명품 가방 문자를 받고 링크된 문의 전화번호를 홀린 듯 눌렀던 기억. 그렇게도 고전적인 수법에 넘어가 명품 가방 몇 개를 사고도 남을 돈을 날리고 오랫동안 분노조차 휘발시켰던 기억. 나의 우둔함과 사악한 스팸과 그저 꼬리 하나 잡혔다는 소식들 중 어느 것 하나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치부가 되었다. 피해자에게 남은 건 물질적 손실만큼 치명적인 자책과 페이크가 난무하는 세상의 환멸이었다.
오랜 기억이 꿈이었는지 헷갈리는 것처럼 단순한 기억의 왜곡이 아니더라도 우리 머리는 이토록 불완전하다. 그렇게 내 앞가림하기도 바쁜데, AI조차 때로는 뻔뻔하게 거짓 정보를 흘리는데, 무슨 재간으로 완벽한 진짜를 판별하겠는가. 누리는 만큼 짊어져야 할 고뇌도 추가되는 것뿐이다.
현미경을 들여다본다. 전시회에 와서 복제된 작품을 보고,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세상에는 모든 음이 다 나와 있고, 작곡이란 그것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달린 것이라고 한 어느 작곡가의 말이 떠올랐다. 특별한 것을 만들려면 그만큼 새로운 아이디어와 조합이 필요하고, 그렇게 비틀어야 흥미로운 요소가 된다.
현미경 속에서 나타난 건 반짝거리는 명품 백이었다. 기능은 사라지고 브랜드의 가치만 놀랍도록 욱여넣은 작은 결정체. 눈으로 보이지 않는 완벽함이란 허망하기가 그지없는데, 현미경을 수반한 콤비네이션 가방?은 고가에 낙찰되었다고 한다. 그 물건의 주인은 가방이 아니라 가치를 산 것이다. 명품이 아니라 작품을 산 것이다.
유튜브 알고리즘을 통해 우리 곁을 떠난 가수의 목소리를 최신곡에 덧입힌 AI 콘텐츠가 올라왔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젠 들을 수 없는 가수의 목소리를 접했을 때 처음엔 반가웠고, 울컥했고, 경이로울 만큼 소름이 돋다 결국엔 우려가 되었다. 콘서트에서 열광했던 그의 목소리가 분명 맞는데.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인간의 감각이라니. 잘 이용만 한다면 절실한 누군가에겐 좋은 용도가 되겠지만, 한 발짝 내밀기도 조심스러웠던 거울의 방처럼, 눈으로 보고도 귀로 듣고도 알 수 없는 부분이 점점 늘어가는 것만 같다.
한때 착시 미술로 유명한 올렉 슈프락(Oleg Shuplyak)의 그림에 관심이 간 적이 있다. 마치 숨은 그림처럼 여러 모습이 겹쳐 보인다. 예를 들어 직관적으로는 사람의 얼굴로 보이다 그 안에 많은 것들이 존재함을 깨닫게 된다. 나무이기도 하고, 갈대밭이기도 하고, 책일 수도 있고, 집이 담겨 있기도 하다. 입체적인 것과는 또 다른 매력이다. 보이는 것에 얼마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나. 세상은 점점 복잡해지는데. 그림도 그런 중의적 표현으로 다가왔다.
매미는 여름 한 철이지만, 해마다 신고식을 한다. 여름의 포문을 열고 생명이 잦아들 때까지 죽을힘을 다해 울어댄다. 존재와 가치를 알리는 방식이다. 여름 하면 떠오르는 상징으로 얼마나 독보적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했던가. 스스로 가치를 높일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연마하거나, 형식에 눌리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하거나.
진짜를 구별하는 일이 난해해져도, 점점 위축되어도, 치부조차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다면, 숙면에도 감사하는 하루라면, 복제되는 세상에 경각심을 가질 수 있다면, 조금 덜 불안해도 되지 않을까. 때로는 덜어낼 건 덜어내어야 한다. 어쩌면 얼굴 하나를 지웠을 뿐인데 많은 걸 삭제하는 것일 수도 있다. 명품이 되는 방식엔 한 가지만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의미를 부여할 때 명품이 되어 살아나는 것처럼. 딱 한 점의 가치는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라 믿고 싶다.
간만에 온 피싱 문자, 타격감 하나 없이 무심하게 차단하고 지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