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벼락 맞던 날 / 김서령
어릴 적 내 이름은 웅후였다. 수웅자 뒤후자. 뒤에 사내동생을 낳으라는 염원이 담긴 작명인데, 그건 나만의 소유는 아니었다. 내 이름은 고모 이름 ‘후웅’을 거꾸로 뒤집은 것이었다. 고모의 고모는 ‘웅후’, 고모는 ‘후웅’, 나는 ‘웅후’. 대를 거듭하며 우리 집안 딸들의 이름은 반복됐다. 딸의 이름은 이를테면 사내동생이 태어날 길을 터주는 전령 노릇을 맡긴다는 임명장이었다. 여러 입에 자꾸 불리면서 이름은 일종의 주문이 돼버렸다. 그 효력은 탁월해 고모에게는 아버지가, 내게는 남동생이 생겨 대문 앞에 떠들썩하게 고추를 매단 금줄을 치는 날이 왔다. 각자 남동생이 태어나던 날, 우리 숙질은 30년의 간극이 무색하게 똑같은 방식으로 사랑어른들에게서 사랑스럽게 머리가 쓰다듬어졌다. 이전에 나는 그저 결손을 증명하는, 안타까움을 환기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설령 칭찬을 들어도 “고추나 하나 달고 나오지, 이것아.”라는 탄식 끝에 툭 떨어지는 손끝이 우연히 내 머리에 닿았을 뿐이라고 느꼈다.
1974년 1월 1일, 친구 희경과 나는 이른 아침 소금벼락을 맞았다. 대구의 어느 우동집 앞이었다. 우리는 문안에 들어서지도 못하고 허옇게 소금을 뒤집어썼다. 막 터뜨리던 웃음을 절반쯤 입에 물고 속수무책 서로 마주보는 사이 상황이 파악됐다. 그날 이후 우리에겐 장사하는 집에 이른 아침 발길을 하지 않는 자동제어장치가 생겨났다. 그건 자동이니만큼 스스로 알아서 착착 작동했다. 자동장치는 날 향해 이렇게도 말했다. 넌 남을 불쾌하게 만들 소지가 있어. 조심해. 까닥하다간 소금벼락을 뒤집어쓰게 돼! 사람은 살면서 생존의 지혜를 절로 얻게 마련이다. 그 후 내 머리는 배가 고프면 식당문 안으로 동행한 남자를 슬그머니 먼저 밀어넣도록 프로그램화됐다. 그 바람벽 뒤에 서 있으면 웃음소리가 웬만큼 커도 방정맞거나 요사스럽지 않았다. 같은 소리라도 명랑하거나 귀여워 보일 가능성이 세배 정도 커졌다. 앞세울 남자에게 붙일 이름은 알고 보니 이미 숱하게 마련돼 있었다. 보호막. 울타리. 그늘. 혹은 주인. 가장. 호주!
호주제 폐지의 목소리가 드높아졌을 때 내가 먼저 떠올린 것은 30년 전 희경과 함께 맞던 소금벼락이었다. 그날 우리는 손을 꼭 잡고 걸었다. 곁에 서로가 없었다면 분을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후에 우리는 그 식당에 다시 갔다. 희경이 따졌다. “아줌마도 여자면서 도대체 왜 그러세요?” 주인은 사람 좋게 웃었다. “그러니까 여자를 죄인이라 카제.” 한사코 쥐어주는 오뎅 두개를 우리는 거절했다. 항의가 고작 그 정도에 그친 건 아줌마가 “죄인, 죄인” 하며 자꾸 손바닥을 싹싹 비볐기 때문이다. 죄인은 실은 어머니가 노상 입에 달고 살던 익숙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어머니를 장례 지내면서 눈이 퉁퉁 붓게 우는 동안 내 발목을 죄고 있던 족쇄가 덜컹 소리를 내며 풀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젠 내 맘대로다! 원죄에서 해방됐어!
막상 살아보니 세월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나를 웅후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세상을 떠났다. 허전했지만 그만큼 홀가분하기도 했다. 남동생에게는 지금 딸이 둘 있다. 동생의 딸은 이제 더 이상 ‘후웅’일 필요가 없다. 후웅 고모는 한 주일에 두어 번 내게 전화하신다. “니 아무개한테 아들 낳으라고 전화했나? 아들을 안 낳으면 큰 낭패 아이라? 그라믄 세상이 머가 되노? 니가 좀 졸라 봐라.” 재촉하신다. 그러면서 음성에 점점 기운이 빠지는 걸 감추지 못하신다. 나는 동생을 조르지 않는다. 삶은 더 이상 의무가 아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의 가짓수가 많을수록 생은 무거워진다. 나는 중간고리다. 내 딸과 조카들의 삶에서 죄인이란 말이 없어지게, 소금벼락에서 해방되게 도와줘야 할 의무가 지금 내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