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담, 문 /                                                                            

 

 그는 순백의 도화지다. 아니 깨끗한 순면純綿이다. 어느 한 곳도 때 묻지 않은 무구함 그 자체다. 눈처럼 희기에, 무엇이든 스치면 여지없이 묻고 번질 것이다. 타인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받아들여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남을 흉보거나 욕할 줄도 모른다. 티 없고 투명한 그 성정이 일순一瞬 부서질까 불안하고 애처롭다.

 

 그는 젊고 건장한 청년. 준수한 얼굴에 곱슬머리가 매력적이다. 오디 같이 검은 눈은 맑고, 웃는 입매는 꾸밈이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뇌병변에 의한 지체장애를 가지고 있다. 조산早産으로 인해 인큐베이터 안에 있을 때, 병원의 실수가 만든 어처구니없는 횡액이었다. 여러 차례 수술했으나 스무 살이 넘도록 일어서지 못했다. 최근 네 차례나 받은 발목과 무릎 수술로 겨우 걷게 됐지만, 걸을 때마다 상체가 앞으로 쏠려 엎어질 듯 뒤뚱거렸다. 스물셋, 앳된 나이가 주변 사람의 가슴을 쓰리게 한다.

 

 “다른 능력은 오히려 특출해요. 영어는 물론 일본어 실력도 뛰어나고 수영도 물개처럼 잘해요. 드럼연주도 학원에선 최고예요.”

 자랑스레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목소리는 떨렸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엄마의 눈물과 헌신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림자처럼 꼭 붙어 다니는 모자의 표정은 언제나 해맑다.

 

 그를 만난 건 올봄이다. 수년 전부터 나는 장애인복지관에서 글쓰기 강의를 하고 있다. 수강자 대부분은 중증 장애를 가진 나이 지긋한 여성들인데, 의외였다. 봄학기 첫날 맨 앞자리에 그가 단정히 앉아있었다. 외국어 능력이 탁월한 그가 혹시 나중에 번역일을 하면 어떨까 싶은 엄마의 소망이 이 강좌를 찾게 한 것이다. 무엇을 외우는지 연신 중얼거리면서도 때때로 창문 밖 엄마와 시선을 맞췄다. 소리 없이 입을 벌려 환하게 웃는 모습이 서로 많이 닮아있다. 여태까지 끊지 못한 탯줄로 두 사람은 오롯이 한 몸이다. 엄마의 안온한 그늘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은 채, 말랑말랑 굳지 못한 덩치 큰 아이였다. 모진 세파도 겪어보지 않았지만, 어떤 성취도 맘껏 누려보지 못했다. 자기만의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과 소리로만 모든 걸 상상하고 판단했다. 다니는 장소, 만나는 사람이 제한적이라 보고 듣는 폭은 얇았지만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열의와 집중력은 대단했다.

 

 강의를 시작하기 전,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었다. 한 사람씩 간단한 이력을 말했다. 근데 유독 그는 현재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소설처럼 엮어 쓴 침을 뱉듯 구구절절 쏟아냈다.

 

 “거듭 수술해도 별 진전이 없고 칼끝 같은 통증은 온몸을 난도질했어요. 수술을 몇 번이나 더 받아야 끝날지 몰라 캄캄했지요. 의사마저 고개를 갸우뚱할 때, 그만 죽고 싶었어요. 마침 집엔 아무도 없었고, TV에선 연일 비가 계속된다는 예보가 왕왕대던 저녁. 문득 서랍 속, 커터 칼이 떠올랐어요. 내 운명이 미워 비통했고 엄마한텐 한없이 미안했어요. 내가 없어져 엄마를 풀어주고 싶었어요. 엄지손가락으로 칼날을 밀었다 내렸다 하며 왼팔 손목을 보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어요.”

 어눌한 그의 말에 사람들은 긴장한 채, 모두 침을 삼켰다.

 “우리 아들 뭐 해? 저녁때 잡채 만들어주려고 마트에 왔어. 단팥빵도 사 가니까 조금만 기다려! 아들, 사랑해!”

 엄마의 경쾌한 목소리에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고 한다.

 “내가 이렇게 가고 나면 엄마도 살지 못할 것 같았어요. 나 땜에 고생만 하다가 너무 가엾잖아요.”

 

 눈가가 붉어진 그는 칼을 제자리에 갖다 놓고 일본어 단어장을 다시 집었다고 떠듬거리며 말했다. 숨죽이며 듣던 나도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글쓰기 공부에 놀랄 만큼 열성을 보였다. 복잡한 한글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수록된 두툼한 문법책을 일주일 만에 통째로 외우는 신기함을 보였다. 하지만 끈질기게 옥죄는 다리의 통증과 느닷없이 찾아온 시력장애가 다시 한번 그의 발목을 잡고 소망과 의욕을 무너트렸다. 봄 강좌가 끝나갈 즈음, 원인 모를 시신경 손상으로 또다시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맘먹은 일을 하고자 할 때마다 번번이 가로막는 벽. 반드시 이겨보려 이를 꽉 물어도 한 걸음도 허락하지 않는 담. 쉼 없이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이제는 눈물마저 말라버린 기구한 삶이 처절하고 애통하다. 끝내 주저앉지 않기 위해 혀를 깨물어 보지만 건널 강과 넘을 산이 너무 깊고 험했다.

 

 장애를 가지고 평생을 살아간다는 것, 얼마나 무겁고 벅찬 짐일까. 이제 겨우 스물셋. 어린 나이가 측은하고, 남은 세월이 아마득하다. 장애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어찌 보면 나이 많은 장애인이 훨씬 더 딱하고 서글프다. 장애와 노쇠老衰의 이중고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매주 그를 볼 때마다 성큼성큼 걷고 싶은 앞길을 악착같이 가로막는 장애가 원망스럽다. 살아갈 긴 세월과 창창한 시간이 염려되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시리고 아렸다.

 

 그는 하루에도 희망과 절망 사이를 수도 없이 오간다.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흔들리며 힘겹게 견딘다. 부디 파도처럼 덮치는 고통이 잦아들어 바라는 대로 훌륭한 번역가가 되어 소리 없이 환하게 웃는 모습이 보고 싶다. 맑고 순수한 성정이 훼손되지 않게 더 이상의 액운이 비껴가기를 그래서 제발 그가 절망하지 않기를 기원한다.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나, 기도에 간절한 마음을 모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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