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탕의 시간 / 김철희

 

무거운 쇳덩이가 하늘로 치솟다가 아래로 곤두박질 치자 쩍 하고 나무토막이 쪼개진다. 치켜든 팔과 다리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낙차를 이용해 굵직한 토막을 여러 개로 쪼갤 때마다 온전히 충격을 감내해야 한다. 찬바람에 온몸을 내맡기고, 날을 세워 내리치는 도끼질에 쓰러져가는 소리를 홀로 묵묵히 받아내는 일을 아픔이라 여겨본 적이 없다. 주어진 소임이 그러하거늘, 어디에 대고 하소연할 곳도 없다. 진종일 패고 또 패고 그렇게 쌓인 장작은 겨우내 아궁이 속에 투척이 돼 장렬하게 회색빛 재로 산화한다.

 

타고난 운명은 늘푸른나무였다. 땅속에서 씨앗을 틔워 가늘디 가는 줄기로 햇빛과 바람을 마주하며 하늘 향해 솟구치고, 옆으로는 팔을 뻗어 가지를 만들었다. 세상의 풍파 속에서도 거뜬히 육중한 몸을 지탱해 온 힘이다. 남들은 가지를 거추장스럽다 부러뜨리지만, 지상의 뿌리는 가지다. 잡풀과 우거진 군락에서 햇빛을 쫓아 생존의 치열한 경쟁을 하며 몸집을 키우고, 지구상에서 멸종되지 않고 버텨온 세월이 억겁의 세월이다.

무릇 생명체는 탄생과 소멸이란 짐을 함께 갖는다. 제명대로 소임을 다한 생은 복된 삶이지만, 뜻하지 않은 일로 원하지 않는 시기에 맞닥뜨리는 초라한 퇴진은 쓸쓸하다. 세상사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익히 각오하고 있었다. 부질없다 할 때 그저 빨리 소멸하기를 바랐다. 수백 년을 어둠 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풍파를 견뎌온 고목이 세상에 유용한 자재로 환골탈태한 것은 부러운 일이다.

잔가지는 쭉정이 불쏘시개로 쓰임을 다하지만, 모탕은 몸집이 굵고 딴딴한 재질 덕에 제때 스러지지 못하고 남겨져 방치되다 땅과 가장 밀접하게 살갗을 맞대며 쓰인다. 뿌리로부터 분리된 처지라 재질은 사막 바닥처럼 건조해 두들겨도 아픔을 모르는 허허로운 처지다. 마치 마취제 맞은 듯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도끼가 표면을 찍어 홈이 파이는 우여곡절을 겪어도 묵언정진의 자세로 시간을 버텨내야 하는 속절없음은 짊어진 숙명이다.

고되고 힘든 삶을 살아오면서 체득하는 자괴감에 낙오가 된 적이 어디 한 두 번일까. 좌절을 소주로 달래며 실오라기 희망이라도 잡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온 여정을 생각하면 그저 눈물겹다. 견뎌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젖 먹던 힘까지 쏟아내며 가난의 먼지를 털기 위해 쪽잠으로 버텨온 만신창이 몰골일지라도 꾸역꾸역 살아가는 건 잉걸불로 남은 희망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몸체가 실금에 갈라지기라도 하면 나무로서의 최후를 맞아야 하지만 그중 온전한 것은 곡식을 땅바닥에 쌓을 때 밑에 괴는 나무토막으로 쓰인다. 농부는 추수를 마친 벼를 따가운 가을 햇빛에서 건조해 마당 한켠에 재인다. 지면과 살을 맞춘 굄목은 비가 내려도 가마니를 젖지 않게 하는 게 목적이다. 가마니 위에 또 한 가마니, 그 위에 또 얹히기를 반복해도 묵언으로 다 받아내야 하는 고달픈 삶을 견뎌내야만 한다. 무게를 버텨내지 못하면 농부의 한 해 농사를 망치는 일이기에 사명감으로 인내한다.

형형한 별빛이 가득한 늦은 밤, 농부의 가족이 마당 한가운데 마루에 앉아 오순도순 밤이 깊도록 얘기꽃을 피울 때야말로 홀가분함을 느낀다. 달이 휘황하게 대지를 밝히고, 농부의 다솔식구들이 깊은 잠이 들면 비로소 평화로운 시간을 맞는다.

어느 날, 쌓여있던 나락 가마니가 방앗간으로 옮겨지고 나면 소임은 끝이 난다. 농부는 뒤란 장작더미 옆에 쓰임을 다한 나무토막들을 던져놓는다. 내년 다시 쓸 요량이지만 장담 못할 일이다.

소멸하는 모든 것들의 운명은 잊혀짐이다.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존재할 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 내 가슴이 잊지 않는 한 그 존재는 기억된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볼품없는 취급을 당하면서도 스러져가는 순간까지 제 운명을 모두 바치는 모탕의 일생이 경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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