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것들에 말 걸기 / 허정열

 

나른함으로 생각의 속도를 늦추는데, 어디선가 풋풋한 향이 손짓한다. 냄새의 근원지를 따라 걸음을 옮겨보았다. 허공을 타고 4층에 있는 우리 집까지 올라와 코를 자극한 것은 잔디였다. 정원까지 나를 끌고 온 것이 풀이라니, 조금 생경하다. 막 이발을 마친 잔디는 오종종 앉아 있는데 잘려나간 마디는 온몸의 짙푸른 향기를 들고 아파트를 돌아다닌다. 금방이라도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풀 향은 그리움을 끌어들인다. 이렇게 시원스런 향기를 몸속에 키우느라 키를 늘리지 못했을까. 자신만의 독특한 향을 지키기 위해 키 작음을 탓하지 않고 온몸에 푸름을 채웠나 보다. 쪼그리고 앉아 만져보다가 코에 대어보니 고향집 동산이 다가온다.

내 삶의 동산에서 상큼함으로 말 걸기를 시작한 잔디. 정면으로 마주할 때 속삭임을 알아채지 못했는데 속살거리는 소리가 반갑다. 발효와 숙성을 거친 세월의 힘인가 보다. 살아가면서 자연스레 알게 되는 것도 있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멀어져 가는 것도, 뒤늦게 그리움으로 다가서는 것도 있다. 전에는 풀냄새라고 했는데 오늘은 자연스럽게 풀 향기라는 말이 나온다. 호칭이 주는 어감이 관계를 가깝게도 하고 멀어지게도 하는지 유독 향기로의 끌림이 좋다.

어릴 적 뒷동산은 작은 놀이터였다. 친구들과 토끼풀로 꽃시계를 만들어 서로의 팔목에 채워주던 시간이 말을 걸어온다. 파란 잔디는 푹신한 방석처럼 넋 놓고 시간 때우기에 좋았다. 잔일 많은 과수원집 맏딸이, 수시로 불러대는 엄마를 피해 숨어 있기에 적절한 곳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잔디는 허전한 마음을 끌어당겨 너른 풀밭을 선뜻 내어주곤 했다. “산은 침묵으로 살고, 갈대는 흔들리며 살고, 잡초는 짓밟히며 산다.”고 했던가. 앉았다 일어서면 잔디는 소리도 없이 눕혔던 몸을 털고 일어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곤 했다.

살아오면서 늘 경쟁 속에서 주변 사람들과 비교하며 살았다. 외부의 어떤 힘이 가해져도 가치관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고, 옳고 그름에도 고집스럽게 나의 생각을 밀고 나갔다. 타인과 비교하여 경쟁에서 이기려는 마음 때문에 힘들었던 시간들. 분명 모든 생활에는 관성의 범칙이 존재한다. 그것이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일인 줄 알면서도 멈추거나 바꿀 생각이 없었다. 삶의 가치와 행복은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오는 게 아니었다. 변화는 천천히 온다고 했던가. 진정한 행복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다. 소소한 감사에서 행복이 생긴다는 것을 알면서도 비우는데 익숙하지 못한 머리 탓을 해본다. 과거와 현재, 낡은 것과 새것, 젊음과 나이 듦 사이를 오가며 생각이 자유로운 오늘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농촌에 묻혀 살 것 같았던 나도 편리함을 좇아 도시까지 오게 되었고 바쁜 일상은 많은 것을 견디느라 잊고 살게 했다. 추억이란 감정은 사치처럼 빠듯한 생활 속에 끼어들지 못했고 편안함을 바라는 현실은 아득했다. 불편하고 사소한 것들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작은 틈의 몸부림으로 여겨진다. 과거의 끈을 팽팽히 쥔 잔디가 새로운 생각에 다리를 놓아 준 셈이다. 이런 시간이 신선한 매력으로, 나를 다른 사람으로 이끈다. 모르고 사는 즐거움에서 벗어나 새로운 발견은 나에게 주는 자연의 선물이다.

깊어지고 싶은 잔디도 변함없는 관성으로 견뎌왔을 것이다. 화려함은 쉽게 질리게 하지만 소소한 것들은 알아가면서 작은 기쁨을 준다. 화려하고 넉넉한 생활은 아니었지만 작은 온기를 나누며 살아온 삶,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향기로 기억될까.

자연은 고요하지만 역동적이다.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화하면서 소멸을 반복한다. 생성과 변화와 소멸을 의식하지만 그들은 우리 생활을 간섭하지 않기 때문에 늘 바쁘다는 핑계로 거리를 두며 살았다. 주변의 나무, 풀, 바람에게 말 걸기를 해 본 적이 언제였을까. 자연은 칭얼거리거나 투덜거리는 일이 없기 때문에 사사로운 감정이 일지 않는다. 행복은 생각이 아니라 감정이라고 한다. 적적하고 단조로운 일상에서 잔디의 생동감 있는 숨소리를 느끼면서 행복하다. 한 번의 큰 기쁨을 느끼기보다 작은 기쁨을 여러 번 느끼는 게 행복의 관점에서 유리하다고 한다. 풀 향기에 매혹된 하루, 잔디에게서 살아 있는 통증을 느낀다. 모처럼 싱싱한 향기를 분양받은 가슴이 뻐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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