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비추는 거울 / 서미숙

 

 

때죽나무꽃이 오솔길을 하얗게 뒤덮었다. 밤새 눈송이가 소리 없이 쌓인 것만 같다. 순간 흰 눈이 가득한 창밖을 바라보며 "이런 날 산토끼들은 뭘 먹고 살지?"라고 했다는 순수한 영혼이 떠오른다.

오월이면 더욱 생각나는 사람이다. 평생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아이들을 위해 살다 가고 싶다던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이다. 떠돌이로 지냈던 그가 빌뱅이 언덕 아래 마지막으로 정착했던 집을 찾아갔다. 해거름의 분위기를 느껴보고자 나선 길이다.

입구에 있던 오래된 상엿집이 헐려 못내 아쉽다. 상엿집보다 더 바깥에 있던 집, 울도 담도 없는 하천부지에 지은 오두막이다. 백무산 시인은 도저히 사람이 살만한 집이 아니라고 했지만, 외딴집에 있으니까 마음대로 아플 수 있어서 편하다고 했던 곳이다.

여름이면 마당이 어두울 정도로 우거졌던 둑 위의 나무들도 너무 많이 베어버려 허전할 지경이다. 사람들의 발길이 빈번해지면서 마당 한쪽에 당신이 손수 가꾸던 손바닥만 한 부추밭마저 사라져 버렸다.

봄마다 환하게 피던 개나리꽃 뒤에 강아지 뺑덕이 집도 휑뎅그렁하다. 선생의 동화 '오소리네 집 꽃밭'처럼 갖가지 약초와 풀이 사이좋게 어우러져 발을 제겨 밟아야 했던 마당은 말끔해지고 삼백초만 살아남아 짙푸르다.

교회 청년들이 흙벽돌 찍어서 지어 준 집이 아니던가. 벽돌 사이에 그가 손수 나무로 만들어놓은 새집마저 빈 둥지다. 당신이 떠나던 해만 해도 새들이 그곳을 지켰는데 시도 때도 없이 사생활을 침범하는 인간들 때문에 거처를 옮겨버린 모양이다. 주인이 없어도 수돗가에 앵두는 여물어 가고, 산수유나무는 몸집이 제법 커졌다.

해거름이나 달밤이면 빌뱅이 언덕에 올랐다는 선생의 발자국을 따라가 본다. 조붓한 골짜기 도랑 가에 콘크리트로 된 징검다리를 새로 만들어놓았다. 징검다리 주변에 어느새 훌쩍 키를 키운 풀들이 우북하다.

준비해 간 전지가위로 웃자란 녀석들만이라도 싹둑싹둑 잘라주었다. 언덕으로 오르는 길에도 오리나무가 팔을 뻗어 길을 막았다. 발에 걸리지 않을 만큼 길을 확보해 놓고 나니 다소 마음이 놓인다.

길목엔 범부채 새잎이 한 뼘 이상 자랐다. 그곳에 오를 때마다 선생의 눈길이 닿았을 꽃이다. 마른 대엔 검은 씨앗을 그대로 품었다. 씨앗 몇 개를 받으며 심을 곳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늦여름이면 범무늬 주황색 꽃대를 힘차게 밀어 올릴 터이다. 빌뱅이 언덕에 서서 주위를 둘러본다.

나직한 언덕이지만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날이 흐려 저녁노을을 볼 수 없어 아쉽다. 선생은 달빛 아래서 작품을 구상하고 별이 쏟아지는 하늘을 홀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젊은 시절, 한겨울에도 차가운 마룻바닥에 엎드려 기도했다는 교회 종탑도 보인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승용차 타고 다닌다고 질책하셨지만, 건너다보이는 국도엔 차들이 줄지어 달린다. 남안동 골프장 반대 운동했던 마을 사람들도 급기야 회유 작전에 다 넘어가고, 끝내 보상비를 받지 않은 사람은 권정생 선생뿐이었다니.

빌뱅이 언덕에 뿌렸던 선생의 유골은 바람에 다 쓸려가지 않고 최근까지도 간혹 남아 먹먹하게 했다. 화장터에서 불구덩이 속으로 관을 밀어 넣으며 "선생님, 불 들어가요!" 하던 때가 오래되지 않은 것 같은데 5월17일이면 벌써 17주기다.

해마다 그를 아끼는 사람들이 모여 추모의 정을 나눈다. 세월이 흘러도 전국에서 추모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는 살아있는 성자였다. 비록 몸은 튼튼하지 않았지만, 미야자와 겐지의 기도문 <비에도 지지 않고> 처럼 살았다. 삶과 글이 여일했다. 살았을 때보다 귀천 후에 그가 더 주목받는 이유이다.

몇 년 전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프로젝트를 맡아 전국을 다니며 그가 생전에 교류했던 사람들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대구에서 만난 오십 대 자매는 뜻밖에도 어릴 적 교회학교에서 부르던 노래를 이중창으로 들려주었다. 일직교회 권정생 집사님에게 동화를 청해 들을 때 불렀던 곡이었다. 지난날을 회고하는 자매의 표정이 열두 살 소녀 같았다.

평생 총각으로 늙었지만, 그는 아이들 걱정을 많이 했다. 농사일에 바빠 자식 교육에 무관심한 부모들을 대신해 마을 아이들을 키우다시피 했다. 아이들은 학교 갔다 오는 길에 자기 집으로 가지 않고 권 집사님 방에 먼저 들렀다. 그곳에서 숙제하고 만화영화도 봤다. 돌아가며 빼곡하게 책이 꽂힌 그의 방은 아이들의 도서실이자 놀이터였다.

동네 청년들도 걱정거리가 생기면 그를 찾았다. 그는 마을 아이들의 친구이자 스승이었고, 청년들에겐 정신적 지도자였다.

어둠이 서서히 밀려와 빌뱅이 언덕을 내려왔다. 선생의 방 댓돌 앞 의자에 앉아 보았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세상이 잘못되어 갈 때 좌시하지 말고 어떤 식으로든 참여해야 해요" 조용한 혁명가다운 말씀이었지만 내 발등의 불 끄고 몸 사리기에 바빴다.

멀리 신작로에 달리는 자동차 소리뿐, 적요하다. 방문만 닫으면 암자나 다름없다. 그곳에서 아픈 몸으로 고요히 침잠했던 그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보리쌀 두 홉 삶아 바가지에 퍼 놓고 금 그어가며 한 끼씩 해결했다니. 옷은 몸을 가리면 되고, 집은 눈비를 피하면 그만이었다. 자신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것만으로 생활하면서 보이지 않는 자선을 끊임없이 베풀었던 그는 가난한 부자였다.

그는 내게도 힘을 주는 분이다. 어깨가 축 처질 때면 세상에 쓸모없는 건 하나도 없다고, 너도 어딘가에 귀하게 쓰일 거라고. 조금 쓸쓸해도 괜찮다고. 어눌한 말투로 조곤조곤 격려해 준다.

그곳에 가면 내가 한없이 작아지고 정화된 느낌을 받는다. 실속 없이 분주하기만 하고, 붕붕 떠다니던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좋은 곳이다. 그는 나를 비추는 큰 거울이다.

다시 오월이다. 비명횡사한 오월의 영혼들을 달래기 위함인가. 꽃나무들은 일제히 흰옷으로 갈아입고 예를 갖춘다. 나도 무색옷 입고 선생을 뵈러 갈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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