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생각 /곽흥렬 

산골의 여름은 뻐꾸기 소리로 온다. 보리 이삭이 패기 시작할 무렵, 세상의 풍경이 나른해지는 오후가 되면 저 멀리 산등성이 쪽에서 남편 잃은 청상靑孀의 피울음처럼 뻐꾸기가 "뻐꾹~ 뻐꾹~" 처량하게 목청을 뽑는다.

무연히 턱을 괴고 앉아서 허공으로 오래 눈길을 보낸다. 흘러간 날들의 정경이 주르르 망막에 맺혀 온다. 마흔몇 해 전 가수 조영남이 불렀던 '옛 생각"이 나도 모르게 입가에 흥얼거려진다.

"뒷동산 아지랑이 할미꽃 피면 꽃댕기 매고 놀던 옛 친구 생각난다. <중략> 모두 다 어디 갔나 보두 다 어디 갔나 나 혼자 여기 서서 지난날을 그리네."

가만히 노래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으려니 가슴에 싸한 바람이 인다. 삼십 년 전의 일은 낱낱이 기억되어도 눈앞의 일은 금세 잊어버리는 것이 노년의 특성이라고 하였던가. 이제 내일모레면 새 갑자를 ​맞이하는 나이가 되고 보니, 앞으로 다가올 날들의 꿈을 설계하는 시간보다 아득히 떠나간 날들의 기억을 더듬는 시간이 많아졌다.

하릴없이 동기회 명부를 뒤적거리는 것도 산골로 삶터를 옮기고부터 새로이 생겨난 버릇이다. 누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고 누구는 요즈음 어떻게 지내는지…. 다들 어느 하늘 아래에서 무슨 사연을 엮으며 살아가고 있으려나 전에 없이 까까머리 적 동기생들의 근황이 자꾸 궁금해진다.

이가 빠진 것처럼 드문드문 비어 있는 자리가 눈에 들어온다.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삶터를 옮긴 탓에 이제 더 이상 옛정을 나눌 수 없게 된 벗들이다. 무엇이 그리도 급해서 황망히 떠나간 것일까. 그 이름들을 마음속으로 가만히 불러본다. 어제의 모습인 양 선연히 떠오르는 그리운 얼굴들, 이 너르고 너른 세상천지에서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낸 인연이 얼마나 지중한가를 생각한다. 지금 내가 세월의 힘에 떠밀려 나뭇잎처럼 하나씩 하나씩 져버린 그 이름들을 부르고 있듯. 나 자신이 훗날 그들의 대열에 합류하고 나면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줄 것인가. 갑자기 마음 자락에 서러움이 왈칵 밀려든다.

울적한 심사를 추스르려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겨 입고 산책길에 나선다.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동산과 바위, 나무들이며 시냇물은 예전 그 모습 그대로이건만 사람들이 머물던 자취는 너무도 많이 바뀌고 말았다. 흐르는 세월의 여울에 실려 속절없이 떠나가 버린 시절이 손이 잡힐 듯이 다가선다. 배꼽마당 느티나무 아래 쪼그려 앉아 친구들과 함께 고누 놀이하며​ 세상을 배워 나갔던 어린 날의 영상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어느새 아득한 시간을 거슬러 여남은 살 그때의 나로 돌아가 있다.

요즈음 나는 시시때때로, 푸른 하늘빛을 받으며 천둥벌거숭이처럼 천방지축​ 쏘다녔던 고샅길을 동행 없이 거닐다가 등 뒤에 노을빛을 지고서 집을 향해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기곤 한다. 그런 날엔 옛 생각에 잠기어 무지근한 통증으로 자주 마음의 감기를 앓는다. 그렇게 한 사나흘 끙끙 씨름을 하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 며칠간의 가슴앓이로 새로운 내일을 씩씩하게 펴쳐 나갈 원기를 회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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