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그름 / 김순경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멘다. 폭염이 여러 날 계속되자 논바닥 실금이 빠르게 번진다. 갈기갈기 찢어지고 갈라진 틈새가 속살을 드러내면 농부들의 무거운 한숨 소리가 짙게 깔린다. 갈라 터진 바닥을 메우려고 허둥대지만, 틈새는 깊어만 간다.

 

날만 새면 동녘 하늘부터 살폈다. 새벽노을이 유난히 붉은 날이면 여지없이 불볕더위가 찾아와 논밭을 뜨겁게 달구었다. 금방이라도 한줄기 쏟아질 것처럼 검은 구름이 몰려왔다가 속절없이 사라지는 날에는 곳곳에서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꼭대기만 스쳐도 빗줄기가 쏟아지던 구름이 산허리를 칭칭 감고 용을 써도 정작 비는 한 방울도 오지 않았다. 어쩌다 몰려왔던 비구름마저 밀려나는 날이 늘어가면 마른장마가 끝없이 이어졌다.

 

차진 논바닥이 갈라졌다. 가뭄이 심해지니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거북등이 되었다. 물에 잠겼던 진흙 바닥은 다시는 논이 될 수 없을 것처럼 쩍쩍 갈라져 사지를 비틀다가 잘게 부스러졌다. 가늘게 흩날리던 벼잎이 발갛게 타들어 가자 명주실 같은 잔뿌리가 물기를 찾아 허둥댔다. 아무리 한숨 소리가 들판을 뒤덮어도 실타래 같은 잔뿌리로 단단해진 흙을 움켜쥔 어린 벼는 땅을 포기하지 않았다.

 

논은 생명줄이었다. 물이 없는 논은 논이 아니었다. 가뭄이 길어지면 천수답은 물론이고 문전옥답도 쇳덩이 같은 황무지로 변했다. 농부들은 필사적으로 강바닥을 파고 물을 퍼 날랐다. 희뿌연 아침 안개를 밀어내며 시작된 물 퍼 나르기는 어둠이 내려와 앞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이어졌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다 달라붙어도 타들어 가는 불길을 잡지는 못했다. 바닥을 드러낸 논에는 황금 비늘을 자랑하며 여유롭게 노닐던 붕어 새끼와 수많은 올챙이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죽어갔고 진흙밭을 뒹굴며 퍼덕대던 미꾸라지도 점차 지쳐갔다.

 

중학생 때였다. 그해 가뭄은 정말 대단했다. 댐은 고사하고 저수지도 변변치 못한 시절이라 대부분 논이 천수답이나 마찬가지였다. 산골짝 봉답은 이미 포기한 상태였지만 모내기를 끝낸 들판에는 밤낮 물싸움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어른들의 한숨 소리가 깊어가고 친구들의 결석이 점점 늘어갈 무렵 책가방 대신 삽과 양동이를 들고 등교했다. 공무원과 군인들은 일찌감치 들판으로 내몰렸고 학생들마저 가뭄 극복 운동에 동참하게 된 것이었다.

 

친구들은 마치 소풍 가듯 즐거워했다. 교실에서 공부하지 않는다는 선생님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소리를 지르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일단 운동장에 모여 교장 선생님의 훈시를 듣고 지정 들판으로 흩어졌다. 가는 내내 떠들고 장난치는 학생들을 통제하는 호루라기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남학생들은 삽과 괭이로 웅덩이를 만들고 여학생들은 양동이나 세숫대야로 물을 날랐다. 단숨에 논바닥 가득 물을 채울 듯이 설쳐대던 친구들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시든 풀잎처럼 축 늘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말 수가 줄어들더니 오가는 발걸음도 점차 느려졌다.

 

가뭄은 만만치 않았다. 양동이와 세숫대야로 나르는 물을 논바닥을 적시지 못했다. 어렵게 길어와 붓기가 무섭게 갈라진 틈새로 빨려 들어갔다. 스펀지의 흡입력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갈증에 목이 탄 논바닥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거짓말처럼 물을 빨아들였다. 수십 번을 갖다 부어도 물길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사라졌다. 햇볕은 점점 더 뜨거워지고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자 친구들은 지쳐갔다. 배고픈 기색이 역력한 풋내기 일꾼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논두렁에 드러누워 하늘만 쳐다봤다.

 

논바닥만 엉그름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단단하게 굳어버린 농사꾼의 가슴에도 금이 갔다. 기댈 곳이 따로 없는 소작농들은 하루하루가 절박했다. 늘어나는 어린 자식들을 생각할 때마다 몸도 마음도 빠르게 굳어갔다. 크고 깊게 갈라진 논바닥은 물만 채우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물겠지만, 옹기처럼 단단한 농부의 가슴은 그렇지 않았다. 한번 금이 가면 아물지 않았다. 아무리 미세한 실금이라도 시간이 갈수록 사방으로 뻗어갔다.

 

농부들은 날마다 논을 살핀다. 벼가 영글 때까지 물꼬를 막고 터기를 반복하며 바닥이 마르지 않게 관리한다. 바닥이 갈라져 벼가 빨갛게 타버리면 한해 농사를 망치기에 하루에도 몇 번씩 논바닥을 살핀다. 한창 자라야 할 시기에 가뭄을 크게 겪고 나면 다시 비가 내려도 겉만 멀쩡할 뿐 알이 제대로 차지 않거나 찬다고 해도 싸라기가 된다. 벼는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듯이 세심한 보살핌이 없으면 늦가을 수확은 장담할 수가 없다.

 

가슴도 논물처럼 관리해야 갈라지지 않는다. 매 순간 물꼬를 조절하며 마르지 않게 촉촉이 적셔줘야 쉽게 찢어지거나 갈라지지 않는다. 사고가 폐쇄적이고 경직되면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큰 상처를 받는다. 어쩌다 생겨난 멍울은 세월이 가도 없어지지 않고 옹이로 남는다. 누구는 말했다. 한번 가슴에 새겨진 상처는 절대 지워지지 않는다고. 어떤 위로의 말도 잠시 눌러둘 뿐 치유되지는 않는다.

 

실금 하나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날마다 벌어지는 드라마 같은 일상을 살다 보면 수시로 크고 작은 상처를 입는다. 찢어지고 떨어져 나간 삶을 붙이고 동여맨 채 굳은살처럼 단단해진 상흔을 부둥켜안고 스스로 달래며 살아간다. 설령 지울 수 없는 옹이가 되어 가슴속을 파고든다 해도 진물을 흘리며 감싸고 보듬는다.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도 해갈되었다고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그냥 물을 머금은 채 아물어 갈 뿐이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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